"얼마나 화 났으면 수능시험장 뛰쳐나왔겠는가"

[인권위를 찾는 사람들] 고사장 장애인 차별 시정 이끌어낸 김병하 교수

등록 2004.09.06 11:30수정 2004.09.0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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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1월 5일. 1급 뇌병변장애인 허광훈(37)씨는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004년 대입수능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뇌병변 장애는 중추신경의 손상으로 인한 복합적인 장애를 말하며, 뇌병변장애인은 뇌성마비, 외상성뇌손상, 뇌졸중 등 뇌의 기질적 병변으로 인해 보행 또는 일상생활에 제한을 받는다.

a 시험을 포기한 허광훈씨

시험을 포기한 허광훈씨 ⓒ 대구장애인연맹

허씨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대학문을 두드린 이유는 특수교육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때 한국 '보치아' 국가대표로 88서울장애인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경력도 있었기에, 특수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보치아는 국제 뇌성마비 스포츠 레크리에이션회에 의해 처음 소개된 경기로, 일정한 지점에 공을 놓은 뒤 다른 공을 굴려서 가깝게 접근시키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뇌성마비 1, 2급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특수교육 프로그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뇌병변장애인에게 수능시험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허씨는 휠체어를 타고 교실까지 가는 길에서부터 피로를 느끼더니, 장애인용 화장실과 책상조차 없는 교실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자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보통 뇌병변장애인들은 문제를 풀 때 많은 연습장을 사용하는데, 학교측은 허씨에게 그 정도의 편의도 제공하지 않았다. 허씨는 문제지에 표시한 답안을 OMR카드에 옮기는 과정마저 자신이 직접 지켜볼 수 없게 되자 시험을 치르고 싶은 의욕을 상실했다. 그리고 2교시가 끝나자 시험장에서 퇴장했다.

허씨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공정한 경쟁이라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비장애인에게만 해당되는 논리다.

비장애인을 표준으로 해서 만든 시험제도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장애인에게는 시험방식 자체가 차별로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에게 그림문제를 제시하거나, 청각장애인에게 듣기 평가를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a 김병하 교수

김병하 교수 ⓒ 인권위 김윤섭

허씨가 특수교육 전문가의 꿈을 접은 지 20여 일 후, 대구대학교 김병하(59) 교수는 허씨의 사례를 진정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김 교수가 허씨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허씨와 남다른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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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현재 4년째 대구지역 장애인야학 '질라라비'의 교장직을 맡고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허씨가 공부하며 검정고시를 치렀던 것이다. 또한 김 교수는 '질라라비'에서 장애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대구시교육청에 시정을 건의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허씨가 시험을 다 보지도 못하고 퇴장한 일이 더욱 가슴 아팠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시험을 보다 말고 뛰쳐나왔겠습니까. 자기 손으로 답안에 표시하기도 힘든 사람이 비장애인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김 교수의 진정이 접수되자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은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담당조사관은 대구에 직접 내려가 진정인 김 교수와 피해자 허씨를 만난 데 이어, 피진정인인 대구광역시교육감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등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와 피진정인 측은 상당한 의견접근을 보였고, 양측은 마침내 2004년 5월 10일 국가인권위 차별행위조정위원회가 제시한 조정안에 합의했다. 국가인권위가 내놓은 조정안은 피해자 허씨와 진정인 김 교수의 주장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다.

조정안에 따르면 대구광역시 교육감은 앞으로 허씨가 수능시험에 응시할 경우 장애인 시설이 갖춰져 있는 대구대학교 부설 보건학교에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앞으로 시행하는 대입수능시험에서 허씨 등 장애인 수험생이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연습장을 충분히 제공하고, OMR카드에 답을 옮기는 과정에도 입회시켜야 한다.

"국가인권위의 개입으로 장애인 차별문제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 하나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차별문제는 국가기관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해야만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선도적인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조정은 최종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입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산증인이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 특수 교육이 뿌리를 내리기 전인 1973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왔다. 그는 장애인 관련 시민단체는 물론 특수교육 전문기관의 설립과 운영에도 적극 참여했다.

대구지역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 대구대 특수교육연구소장, BK21 특수교육연구단장, 대구DPI(대구장애인연맹) 공동대표…. 최근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넓고도 깊은 이유일 듯하다.

"제도가 바뀌었다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장애인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귀결짓고 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삶의 구체적 장면에서 겪는 차별문제는 은밀하고도 심층적입니다. 국가가 이러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풀지 않는다면, 차별철폐는 구호에 불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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