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으면 파업해봐!" 손배-가압류에 죽어난다

[긴급기획-2] 2003년 한국, 기댈 곳 없는 노동자들

등록 2003.11.05 14:34수정 2003.11.0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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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탄압 중단, 이라크 파병 철회, 근본적 정치개혁을 촉구하며 지난 28일부터 민주노동당 지구당위원장들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비상시국 노상농성을 벌이고 있다. 최근 자살한 노동자, 농민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농성장에 마련되어있다.
노동탄압 중단, 이라크 파병 철회, 근본적 정치개혁을 촉구하며 지난 28일부터 민주노동당 지구당위원장들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비상시국 노상농성을 벌이고 있다. 최근 자살한 노동자, 농민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농성장에 마련되어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2003년 1월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의 대의원을 지낸 배달호씨가 사용자측의 노조원 감시와 손배가압류를 동원한 노조 무력화 기도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9개월 뒤인 지난 10월 17일에는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130일의 고공크레인 농성 끝에 또 다시 목을 맸다. 이들은 모두 정부와 언론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귀족노조'라고 몰아붙였던 대기업 노조 간부들이었다.

재벌그룹 계열사인 두산중공업과 한진중공업 사업장에서 발생한 두 명의 노조 간부 자살 사태는 '대기업 강성노조, 귀족노조가 경제 망친다'는 정부와 언론의 매도에 가려진 노동계의 현실이 사실은 절망적인 모습이었음을 고발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서 노조 간부들이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 2003년 한국의 현실이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 이를 미끼로 한 노조탈퇴 유도, 노조원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과 같은 사용자측의 노조와해 공세 앞에서 대기업 노동조합도 존폐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 목숨 걸어야 하는 나라"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들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 만원.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고 김주익 지회장이 유서를 통해 마지막으로 남긴 현실 고발이다. 한진중공업 사용자측은 노동자들의 교섭을 통한 사태 해결 촉구에도 파업 50여일이 넘도록 그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파업 참가중인 조합원 개인에게 복귀하지 않으면 손배·가압류를 걸겠다는 협박으로 조합원들의 동요를 일으키고 노동조합의 백기 투항을 종용했다.


두산 중공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 사측의 단체협약 일방해지 통보로 시작된 전면파업으로 노조원 61명이 고소·고발을 당하는 한편,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노조원들은 부동산과 임금까지 가압류 당했다.

이러한 고소고발과 손배가압류는 파업이 철회된 뒤에도 취하되지 않았고 파업으로 노조가 받아든 결과는 임금동결과 사측에 유리한 조항들로 개정된 단체협약뿐이었다. 사용자측이 노조의 불법 파업에 대한 최소한의 자구책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손배·가압류의 위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고 배달호씨는 유서에서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 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라며 울분을 토해냈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두산중공업의 경우 배달호씨가 자살을 한 이후에도 노조집회에 불과 200여 명 정도만이 참석하고 있다"며 "본인은 물론 가족, 신원보증인들에게도 큰 고통을 주는 손배·가압류를 개별 노동자가 견뎌내기는 힘들다"고 한숨지었다.

손 실장은 "청춘을 바쳐 노조를 건설한 이후 일반 조합원들에게까지 손배가압류가 확대되려는 상황에서 고인들이 노조를 지켜내기 위해서 다시 목숨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씁쓸해 했다.

25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지회장 추모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고인의 유서가 낭독되자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가 오열하고 있다.
25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지회장 추모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고인의 유서가 낭독되자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가 오열하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재계 "손배가압류는 최소한의 자구책"

재계는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노조의 불법파업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자구책이라면서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동응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 정책본부장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손배가압류는 노조의 불법파업에 대해서만 제기하는 것으로 노조가 합법적으로 파업을 했다면 손배가압류를 둘러싼 잡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며 노조에게 우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성수 전경련 노동복지팀 차장도 "현재 손배가압류는 사용자측이 노조의 불법파업으로 입은 피해 중 최소한의 부분에 대해서만 행사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마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불법행위를 용인해달라는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재계는 손배가압류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게도 돌리고 있다. 정부가 노조의 불법파업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자측은 손배가압류라는 수단을 동원해 파업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동응 본부장은 "불법파업에 대해 공권력이 단호하게 대처를 한다면 손배가압류는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처음부터 불법의 소지를 제거한다면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정부는 방관만 하고 있다"며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노동계는 현행 노동법 하에서는 노조가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해고문제로 파업을 해도, 구사대와 노조원들간 사소한 충돌에도 불법이 되는 등 합법파업의 범위가 너무 좁다며 불법파업을 양산하는 제도개선 없이는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몰고 온 손배가압류의 해결책은 노조가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파업을 하는 것 뿐"이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 이승훈 기자
"돈 있으면 파업해라"

사측의 손배가압류로 노조가 와해된 경우는 두산과 한진 뿐만이 아니다. 울산효성, 태광대한화섬 노동조합도 손배가압류로 무너진 대표적인 예다. 울산효성 해고자들은 2001년 정리해고 반대 파업으로 73억의 손해배상과 288억의 가압류가 걸려 있으며 태광대한화섬 해고자들은 26억의 손해배상과 91억의 가압류가 걸린 상태이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03년 10월 현재 손해배상·가압류 규모는 45개 사업장, 1335억여원으로 이 중 손해배상 청구액은 560억여원, 가압류 금액은 775억여원에 이른다.

사측은 이제 '돈 있으면 파업하라'며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라는 신무기로 집단으로서의 노동자를 경제적으로 무력한 개인으로 파편화시키고, 정부와 보수언론은 대기업 노조운동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가는 지원 사격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대기업 노조 흠집내기에는 '노노(勞勞)갈등'에 대한 비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대기업 노조는 중소하청업체 노조와 비정규직에 비하면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나눠주려는 연대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 5월 한 TV 프로그램에서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직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며 보수언론을 그대로 닮은 논리로 대기업 노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에서는 정부와 사용자, 언론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스스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대기업 노조에게만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부 산하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의 경우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됐지만 공단 측은 자체적으로 만든 '비정규직 세칙'을 들먹이며 비정규직 노조를 교섭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특히 비정규직 노조 설립도 공단의 방해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상훈 공공연맹 조직국장은 "노조 설립 움직임에 공단 측은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조에 가입하면 연말에 재계약 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했다"고 말했다.

대기업 노조 공격할 때만 비정규직 문제 들고 나오는 정부

25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지회장 추모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25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지회장 추모 노동자대회가 열렸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손낙구 실장은 "노동부 산하 기관 소속인 이용석씨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분신에 이르렀던 것의 책임으로부터 정부가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씨의 죽음은 대기업 노조를 공격할 때만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오는 노무현 정부 노동정책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며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로 대기업 노조를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재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손낙구 실장은 "중소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정규직 임금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으로는 산업별로 최저 임금인상률을 정하기 위한 '산별교섭'뿐인데 재계는 노동계의 이러한 요구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대기업 노조 때문에 임금격차가 벌어진다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현대자동차 노조의 한 관계자는 "그것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하청업체 노동자의 몫을 빼앗아 오기 때문이 아니라 대기업과 하청업체 관계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오는 대기업의 횡포 때문"이라며 "하청업체를 상대로 한 횡포를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위해주는 척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비정규직 노조의 설립을 가장 달가워하지 않는 집단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아니라 재계다.

손 실장은 "현대자동차의 경우 비정규직 노조설립과정에서 사측은 하청업체들 중 비정규직 노조설립에 참여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경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압력을 가하는 등 방해가 있었다"며 "정규직 노조가 사측의 부당한 압력에 제동을 걸고, 비정규직 노조 해고 간부들을 복직시키는데 함께 하지 않았다면 노조 설립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현재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제도 개선과 함께 응급처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1300억 규모의 손배가압류 해결,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평성 있는 법 집행 등이 응급처방이라면 불법파업을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 현재 지나치게 좁게 규정된 합법파업 범위의 확대, 헌법에 보장된 파업권 행사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 제한의 방향으로 장기적인 제도개선을 병행해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가장 먼저 철도와 발전 노조와 같이 공공부문에 걸어놓은 400억 규모의 손배가압류를 취하하고 정부기관의 비정규직 차별을 해결하는 조치들을 마련해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여달라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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