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뺑소니 치지는 말자구요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1.05 16:23수정 2003.11.0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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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효순이 미선이 기도회에 참석하러 갔다 김포 한누리병원 앞에서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한누리휴게소에서 막 나와 큰 길로 진입하려고 하는데, 앞차가 갑자기 후진을 해서 내가 타고 있는 승합차를 박았습니다. 크락숀을 눌렀지만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리둥절했습니다. 차에 아내와 이웃교회 신아무개 목사와 우리집 아이들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내 승합차를 박은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어서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지요’ 라고 나도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승합차 오른쪽 범퍼가 긁히고 찌그러졌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가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안 갖고 왔다며 종이쪽지에다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아무 때고 전화를 주시면 보험처리를 하던지 돈으로 변상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소리 한번 안 지르고 그 사람은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 내려오다 그 사람이 적어준 메모를 보고 전화를 했더니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니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수차례 전화를 해도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니라며 화를 내는 것입니다. 분명히 어제 그 사람 목소리인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럼 어제 그 사람이 가짜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교동에 들어와 카센터에 들려서 수리비용을 물어보고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카센터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 차번호를 아냐고 해서 여기 적어 놓은 쪽지가 있다고 했더니 그러면 빨리 파출소에 가서 ‘뺑소니 신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카센터 주인의 말을 듣고 파출소에 가서 전후사정을 얘기 하자, 경찰관은 그런 사람은 골탕을 먹어야 한다며 차적 조회를 하는데 그 사람 전화번호와 집주소가 내게 적어준 쪽지와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기가 막혔습니다. 전화를 받고 ‘오리발’을 내민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자기를 자기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세상인심의 통로가 꽉 막혔나 싶은 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찌그러진 자동차 범퍼를 수리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난 다음 다시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당신 뺑소니로 신고 하겠소!’ 하고 소릴 질렀더니 그제 서야 순순히 미안하다고 자동차수리비는 자기가 꼭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꼭 그 돈을 통장으로 송금해 준다고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송금해 주기로 약속한 날짜가 해를 넘겨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수차례 통장을 조회 해보았지만 그 사람에게 송금된 돈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 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나보고 지금이라도 ‘뺑소니 신고’를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기 마음을 뺑소니’ 하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뺑소니 신고’ 하면서 겪게 될 내 마음의 상처가 더 클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요즘 세간에 SK비자금 수수 사건으로 정국이 요란합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자금을 확대해서 수사할 것이라 하자 야당 대표는 야댱 파괴공작이라고 응수합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내 편이고 네 편이고 다 거기가 거기 아니겠습니까?


‘잘못했다’고 국민들에게 사과를 했으면 더 머리 숙여 겸손하게 처신해야 할 사람들이 편파수사니 어쩌니 하면서 국면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모습이 너무 유치합니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현주소라고 하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정치는 바로 잡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고,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는 것을 정치인이 알면 그는 정치를 정치(政治)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 껍데기를 쓴 위선자들은 다스리는 것은 군림하는 것이고, 군림하자면 호령하는 것으로 알고 우깁니다. 이런 무모한 고집 탓으로 잘못된 정치가 세상을 어지럽히게 됩니다. 이런 사이비 정치인들의 정치는 항상 정치(政治)가 아니라 정치(征治)로 판을 벌리게 됩니다.

옳은 것이면 감출 것 없고 선한 것이면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옳지 않은 것 인줄 알면서도 그 짓을 범하고 악한 것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하면 죄는 이미 그 씨앗을 뿌리고 터를 잡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은 짓을 하면 온 나라가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막막한 것은 없습니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왜 밝은 대낮에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밤에 귀를 맞대고 눈길을 서로 훔쳐야 하는 것입니까? 숨길 것이 많고 감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검은 돈이 이권에 맞물려 전달되고 버젓이 나라의 선량(善良)인양 애국자인양 행세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나는 작년 이맘 때 내 차를 받고 ‘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던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납니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양심을 저당 잡히고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아무데서나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서 자꾸 쓴웃음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다 ‘뺑소니’ 신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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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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