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장]호주제 관련 민법개정안 한나라당 공청회

등록 2003.11.13 20:44수정 2003.11.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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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관련 민법개정안 한나라당 공청회가 지난 13일 오후 2시 한나라당사 10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나라당 임진출 여성정책위원장은 개회사에서 "호주제 문제는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므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여론 수렴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강두 정책위원장은 "호주제는 그동안 우리의 뿌리이며 바탕이요, 기본이나 시대 변화를 고려하여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며 "국회 제 1당으로서 호주제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a 호주제 관련 민법개정안 한나라당 공청회

호주제 관련 민법개정안 한나라당 공청회 ⓒ 송민성

한나라당 이원형 제3정책 조정위원장의 사회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 조정위원장은 "호주제 폐지 찬성 세명, 반대 세명, 중립 한명을 패널로 초청해 상당히 중립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나다 순에 의해 제일 먼저 발표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이혼가정, 재혼가정, 한부모 가정 등의 새로운 가족형태를 담아내기 위해서 호주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며 호주제 폐지를 주장했다. 곽 소장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2003년 4월 16일부터 5월 16일까지 한달간 연령과 지역을 고려한 95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6.2%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한 것을 근거로 들어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정가련) 구상진 공동대표는 "호주제 폐지론자들의 설문조사와 통계자료는 부실하고 편파적"이라고 평가하며 "정가련 홈페이지를 통해 자유롭게 찬반투표를 시행한 결과 폐지 의견은 단 9%에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 구 대표는 호주제 폐지 반대론자들을 배제한 '호주제폐지특별기획단' 설치, 국무회의 결의 과정의 부당성 등을 이유로 "법안 입안절차 역시 불공정했다"고 비판했다. 계속해서 구 대표는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북한 가족법과도 긴밀히 연결된 것이 분명"하다며 "호주제를 폐지하자는 것은 민족반역죄를 짓는 것이며 명백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는 "같이 살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며 이산가족도 가족이 아니다"라는 이색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a 우리는 찬성

우리는 찬성 ⓒ 송민성

뒤이어 발언한 정미화 변호사는 "호주제가 존치론자들이 주장하듯 우리 전통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면 이는 제사나 종중처럼 민법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민사에 관한 관습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며 호주제를 굳이 법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남대 정환담 교수는 "가족은 국가의 본질적 구성요소이자 생산, 소비, 문화, 교육 등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옥탑방'(동거 가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들이 철이 들면 돌아올 제대로 된 가정을 지켜주어야 한다"며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a 우리는 반대

우리는 반대 ⓒ 송민성

호주제폐지반대 시민연대 김대인 대표는 "호주제는 당장이라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을만큼 귀중한 것"이라며 "호주제 폐지는 단순히 단어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역사와 사상, 문화를 바꾸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민족들이 정신대와 징용으로 끌려갈 줄 알았더라면 이완용도 한일합방을 반대했을 것"이고 "호주제의 다기능적 역할과 가치를 안다면 도저히 부끄러워서 호주제 없애자는 이야기는 못할 것"이라며 호주제 폐지론을 비난했다. 또한 김 대표는 여성단체에 "부부는 일심동체, 무촌인데 자꾸 평등이니 뭐니 해가며 부부싸움을 부추기지 말라"고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사무총장은 "남성우위를 전제로 남자에게만 승계되는 호주제를 폐지하는 것과 조상을 존경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시종일관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3시간여의 토론이 끝났다. 사회를 맡은 이원형 정책위원장은 "찬반양론이 격렬할 때는 공청회가 중단되는 일도 있는데 오늘은 그런 일 없이 잘 진행되었다"며 "이 자리의 다양한 여론을 수렴해서 당론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토론을 마친 이들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엘리베이터를 따로 타고 공청회장을 빠져나갔다. 서로 등을 돌린 그들의 모습이 보여주듯 여전히 호주제를 둘러싼 이견(異見)들을 좁히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X들이 뭘 안다고…"

▲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래
토론에 앞서 이원형 정책위원장은 "민감한 사안인만큼 패널과 청중들은 서로 비난하고 공방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일부 패널과 청중들의 과격한 언행으로 토론은 '예상대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은 반대측 패널들이 발표할 때에는 "옳소!"라며 박수를 쳤고 찬성측 패널들이 발표할 때에는 "찬성하는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어, 다 아버지 없는 것들이야" , "곽배희씨한테 교육받으러 온 거 아니야, 다 아는 얘긴 집어치워"라고 언성을 높였다.

구상진 변호사가 "내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한다고 여자들이 미친 놈이라고 욕하고 어느 홈페이지에는 "머리를 도끼로 찍어라"는 글을 수천 개나 올렸더라"고 하자 마치 그 당사자가 공청회장에 있는 듯 "누구야? 누가 그랬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한 남윤인순 사무총장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남동생이 호주가 되었을 때 이상함을 느꼈다"고 발언하자 "그러니까 호주제를 폐지하자고 하지"라며 비난했다. 그들은 "좀 조용히 하자"는 한 청중의 말에 "머리에 피도 안마른 X이 어디서 큰 소리냐" ,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나서냐"고 힐난하기도.

이번 토론에서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조용히 이야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한 쪽은 호주제 폐지 반대측 패널들과 청중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언성을 높이고 감정을 참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다. / 송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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