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부족하지만 그정도면 수"

[인터뷰]호주제폐지운동본부 이구경숙 여성단체연합 정책부장

등록 2003.11.13 22:52수정 2003.11.1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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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여의 민법개정안 공청회가 끝난 뒤 한국여성단체연합 이구경숙 정책부장을 만났다. 그는 호주제수호청년회 소속의 한 청년과 가벼운 논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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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호주제 폐지의 입장은 보도하고 있지 않잖습니까?"
"왜 실어 주지 않는지는 생각해 보셨어요?"

그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논쟁을 계속하는 대신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남을 마무리했다.

늦깎이 여성 운동가, 이구경숙

a 이구경숙 정책부장

이구경숙 정책부장 ⓒ 송민성

이구경숙씨는 '늦깎이 여성 운동가'이다. "여자라고 해서 특별한 차별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고정된 성역할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본격적으로 여성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서부터다.

"시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왠지 주눅이 들더라구요. 조금 과장하면 그 집 종이 된 느낌이었어요."

시부모는 매우 사려깊고 친절한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함을 순간순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설거지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것 같고 차 수발도 들어야 할 것 같고…. 굳이 시키지 않아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은 친정에 갔다고 해서 설거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면서 그는 서서히 여성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에 가입했다.


"삭발, 단식 빼고 할 수 있는 것 다했어요"

한국여성단체연합은 99년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시키며 호주제 폐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서명운동, 사이버 시위를 통해 국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토론회와 의원 간담회를 열어 정치인들에게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을 알려 나갔다. 2000년에는 '부가입적제도, 부가성본 우선주의, 남성중심 호주승계제도 삭제'를 골자로 한 청원을 내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들 한 명, 한 명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노무현 후보로부터는 "1년 안에 폐지", 이회창 후보로부터는 "폐지 검토"라는 답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처음에 호주제 폐지에 관련한 토론방을 개설했을 때 거의 욕설과 비난으로 초토화되어 버리곤 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여러 기관의 설문 조사를 종합해 볼 때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이구경숙씨는 "정말 삭발, 단식만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길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겹게 한 것은 "어떻게 해도 무너뜨릴 수 없는 편견의 벽"이었다.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면 참 힘들죠. 내가 욕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은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겠구나'하는 좌절감이 더 고통스러운 거죠."

그리고 한가지 더 있다. 바로 나서지 못하는 당사자들.

"저는 피해자 중심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야 설득력을 가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요. 그렇다고 저희가 강요할 수도 없구요. 현재의 상황에서 나서는 분들은 또 다른 피해를 겪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호주제 폐지, 부족하지만 "일단" 이 정도면 '수'

이구경숙씨는 사실상의 호주제 폐지 내용을 담은 현재의 민법개정안에 "이 정도면 수"라는 후한 점수를 준다.

"이미경 의원이 발의한 시민단체안과 틀린 점이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가족의 범위가 포함되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성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대신 부성을 원칙으로 하고 협의 하에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가 민법개정안에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범위는 굳이 민법에서 규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유산이나 보험, 연금의 수혜, 제재를 위한 혈족 개념이 법에 다 정해져 있어요. 민법에 다시 적어 놓아 봤자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는 쪽이 사람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그는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다.

"워낙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요. 정책 결정 과정이라는 것이 딱 부러지는 학자들의 이론 연구가 아닌 이상 국민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그는 완벽한 민법개정안을 만드는 일을 '2단계'라고 표현했고 "궁극적으로는 2단계까지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1단계도 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국회 통과라는 제일 어려운 관문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 폐지의 막바지 총력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

"국회 앞 1인 시위는 물론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맨투맨으로 달라 붙어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사실 정치인들도 세세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개정안은 가족의 범위를 재규정했고 부성강제주의를 부성원칙주의로 변경하여 반대할 근거를 이미 상당 부분 수용한 상태입니다. 반대할 명분이 없어진 거죠."

만약 16대 국회안에 통과되지 못한다면 호주제 폐지 반대 의원을 대상으로 하는 낙선 운동도 펼칠 예정이다.

16대 국회는 대답하라

"저는 법은 교통 사고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교통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때 교통 사고법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교통 사고를 당하면 매달릴 곳은 교통 사고법뿐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우리들이 어떠한 가족 형태를 가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길래 누가 이혼하라고 그랬냐"라고 핀잔을 주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말대로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혼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몇몇 사람들의 피해를 과장한다고들 해요. 하지만 언제나 피해자는 소수예요. 한 명이 피해를 받더라도 법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인권국가 아닌가요?"

이구경숙씨는 "얼른 호주제를 폐지시키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외국인 여성 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요. 인식을 바꾸는 교육 운동이나 아래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는 풀뿌리 지역운동도 해 보고 싶어요. 참 국제연대활동에도 흥미가 있어요, 선진 사례를 배우고 우리의 실천들을 제3세계에 전해 주는 그런 활동말이죠. 호주제 폐지운동도 제3세계에 하나의 본(本)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국회를 향해 말을 시작했다.

"16대 국회는 2000년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을 통해 태어났어요. 새천년의 기대감과 함께 유권자들의 꿈과 희망으로 구성된 국회예요. 그런데 99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똑같아요.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졌고 이제 사람들은 정치혐오를 넘어 정치무관심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어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이제라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총총히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미 피곤한 기색은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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