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 '대장장이' 되다

지리산 운조루 <길> 촬영 현장에서

등록 2003.11.15 01:44수정 2003.11.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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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처럼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배창호 감독
소년처럼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배창호 감독김대호
우리 나라 5대 명당 중의 하나라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아흔아홉간 운조루에 '모루'를 지고 나타난 대장장이가 있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외투에 수염은 며칠이나 깎지 못한 듯 덥수룩한 그는 아궁이에서 엿을 고는 아주머니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흑수선> 이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배창호 감독이었다.

"대장장이가 잘 어울리네요"하는 내 말에 스태프 중의 한 명이 "그럼 배 감독님 얼굴에 멜로물을 찍겠습니까"하자 금세 주변이 웃음 바다가 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듬직한(?) 배 감독의 얼굴과 몸매를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마시던 찻물에 사레 들릴 정도로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 영화 <길>을 통해 배 감독은 확실히 주류(?)의 틀을 벗어버리려고 각오를 단단히 한 듯싶다. 이 영화에서 그는 감독과 주연이라는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이번 영화는 한국적 로드 무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떠돌이 대장장이라는 화자(話者)를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내려고 합니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조금 전 내 폭소가 겸연쩍다.

엿을 고는 아낙에게 농을 거는 대장장이 배창호 감독
엿을 고는 아낙에게 농을 거는 대장장이 배창호 감독김대호
환갑의 나이에 대장장이가 된 그는 왜 풀무도 없이 시우쇠를 짊어지고 장터를 떠도는 것일까? 나는 문득 그가 문둥이 시인 '한하운'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전라도 길' 어디쯤에서 발가락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인이 나병 환자라는 천형(天刑)의 수인(囚人)이 되어 끝없는 고독과 유랑의 길을 가야 했듯이 그에게도 그 무언가가 끈질기게 머무를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한하운 파랑새>

한하운이 파랑새를 찾았던 것처럼 그는 취재 내내 수없이 '그리운 것들'을 표현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규정하고 시작하는 극단적인 독단과 개연성 없는 반전, 밀어붙이기, 자칫 새로워 보이지만 앵무새처럼 동일한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해 내는 요즘 영상에 대해 불만인지도 모른다.

능청스럽게 할머니 연기를 해내는 젊은 배우
능청스럽게 할머니 연기를 해내는 젊은 배우김대호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대장장이가 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끄는 클래식 기타의 음률을 통해 슬쩍 곁불을 쪼일 수 있는 고도로 절제된(결코 대사로는 표현하지 않는) 시(詩, 혹은 길)의 영상은 의도된 것임이 틀림없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무엇이 비이상적인지 말할 수 있다. 이제 영화가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만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영화는 이미지로 얽어 놓은 소설이 아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고 감독은 관객의 마음 속에 침투해서 영화의 주제에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감독은 질문을 던질 뿐 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국의 영화감독이 찾던 영화가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


배창호 감독은 나그네가 되어 길을 걷는 대장장이를 통해 기억의 편린이 된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의 회복과 훼손된 관계들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역사의 삽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감독·주연 배우 1인2역, 지금은  감독으로 돌아온 배창호
감독·주연 배우 1인2역, 지금은 감독으로 돌아온 배창호김대호
이 영화 제작자인 강충구 이산프로덕션 대표는 "이 영화는 가장 전형적인 독립 영화다. 그러므로 충무로는 절대 돈을 대지 않는다. 한국 영화계에 희귀한 영화 한 편 나왔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관객에게 평가를 받겠다"고 말한다. 스태프가 20여 명에 불과한 것을 보니 제작비를 마련하기 상당히 버거운 모양이지만 표정만은 밝다.


모루를 등에 지고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떠나는 그의 이번 여행이 성공으로 끝나 부디 시골 여느 장터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주류를 버리고 아웃사이더를 선택한 그가 주류가 되는 영화판을 기대해 본다.

"요즘 영화, 사색과 정서화 아쉬워
'운조루'는 그리움에 대한 해답을 가진 곳"

▲ 배창호 감독
- 왜 '길'이라는 화두로 영화를 만드십니까?
"길은 시작이 없으므로 끝도 없다. 나그네인 '떠돌이 대장장이'를 통해 길에서 찾고 싶은 것들이 있다. 황톳길, 시골 이발소, 염전…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 영화는 50년대를 출발해 70년대에 이르는 시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시골 장터를 떠도는 대장장이를 통해 옛 시절 우리들에게 친근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해 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정서인 '그리움과 사랑'을 키워드로 삼고 싶다."

- 운조루에서 상당히 많은 작품을 찍은 것으로 아는데?
"<정>에서도 주인공의 집으로 썼고, <흑수선>에서도 이미연의 집이었다. 이번에는 재래 엿을 만드는 장소로 촬영 중에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부제인 '사라져 가는 것들을 위하여'라는 말이 잘 설명해 줄 것 같은데 내 심성에 근저에 깔려 있는 '그리움'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 왜 떠돌이 대장장이인가?
"그가 짊어지고 다니는 모루는 천형처럼 지워진 '멍에' 같은 것이다. 우직해 보이고 강인해 보이지만 떠돌이 대장장이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가슴도 가지고 있다. '모루'는 인간의 고통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길>에는 어떤 음악이 흐르는가?
"베를린 음대에서 기타를 전공한 '이성우'라는 친구가 곡을 쓸 것이다. 떠나는 대장장이의 발걸음과 보헤미안 기질의 클래식 기타음이 잘 어우러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 요즘 우리 영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다양해야 대중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겠지만 아이디어와 기발한 것, 사람의 시선을 자극하는 눈요기 거리 이런 것들이 너무 넘치는 것 같다. 그윽한 사색과 다양성을 정서화 시키는 노력이 아쉽다." /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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