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르바이트나 할까?

서강훈의 <즐거운 고딩일기>

등록 2003.11.16 22:57수정 2003.11.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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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

토요일부로 졸업시험이 끝나고 나자 고3들은 더욱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현행 교육과정에서 입시와 시험을 준비하느라 학생이었던 이들에게 이제 '학생'으로서의 임무는 끝이 난 셈.

그러나 이들은 방학 때까진 학교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확실히 학생은 학생이다. 비록 학교에 나가 얼굴도장을 찍으면 그만인 학생이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절반의 것이다. 오전에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인이 되기까지 약 두 달 정도 어리다는 것도 절반의 자유를 저해하는 요소다.

자유의 시간을 시험이 끝난 고3학생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어떤 학생들은 그간 못 보았던 책을 보기위해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볼 것이고, 어떤 학생들은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위해 책상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들도 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일 없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밥 먹고 잠만 자거나 괜히 친구들을 만나 돌아다니거나 하는 치들. 알고 보니 고3학생들의 많은 수가 본의 아니게 이런 '백수'가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백수로 만드는가? 그네를 백수를 만드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주어진 많고도 많은 감당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많으니 수능 전에 벼르던 일 하면 되지'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네에게는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계획을 세워 실천한다고는 해도 '한 두 시간 정도 논다고 어떻게 되겠느냐'하는 심리가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추워지는 날씨에 비해 따뜻하고 안락할 뿐만 아니라 먹을 것까지 있는 집에서 머물고 싶은 유혹이 그 거창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편안함을 찾게 됨에 따라 의지박약 상태가 되는 것이랄까.

같은 반 친구이자 3년 지기인 Y와 함께 보낸 지난 일주일만 보아도 그렇다.

아침 눈을 비비고 일어나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 졸업시험을 치른다. 한두 시간 정도 있다가 학교에서 나온다. 그리고 '플스방(플레이스테이션 게임방)'에 가거나, '풋살장(간이축구장)'에 간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집에 와서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하루를 마감한다.

시험 전에는 소설을 써서 해리포터를 능가하는 그런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고 큰 소리 탕탕 치던 치와 신춘문예를 노리겠다고 허풍을 떨던 본인이 플스방 저 구석에서 눈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게임을 하고 있을 줄을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글을 많이 쓰고 싶고, 하고 싶던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계획도 잘 해내고 있지 못했다.

곰곰이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한창 시끄러웠던 그 누군가만 '주변인'이 아닌 듯싶다. 지금의 우리도 주변인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학생!'하고 부른다면 얼른 '예!'하고 대답할 우리는 학생이다. 그런데 또 다른 얼굴은 집에서 가만히 노는 사람이다. 묘한 색감의 존재를 주변인이라 친다면 우리는 그 묘한 색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무위도식의 생활은 오래갈 것 같지가 않다. 단지 시험이 끝난 이 겨울에만 그럴 뿐일 것이고 대학에 갈 내년 봄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그러지 않길 빌 뿐이다).

길지 않을 동안에만 그럴 테지만 현재로써는 그렇게 우리는 주변인 생활을 하고 있다.

구박이 싫어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이 가련한 인생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따끔한 비난의 화살을 견뎌내야만 한다.

같은 반 친구 P 역시 가족들의 면박에 서럽고,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그간의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P: "아, 정말 집에서 뭐라 해서 못 견디겠다."
S: "왜, 집에서 뭐라고 하는데?"
P: "수능은 잘 보지도 못한 주제에 집에서 놀기만 한다고 욕하질 않나 그렇다고 친구 만난다고 나가려 하면 시험도 못 본 놈이 친구는 왜 만나냐고 하질 않나."
S: "그러니까 너네집 사람들 불만은 '시험을 못 보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마라'인데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또 뭐라고 한다 이거 아냐?"
P: "그렇지 잘 알고 있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바로 재수를 할 수도 없고 성적도 안 나왔는데 어쩌라는 거야.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신다니까. 그나저나 나 미치겠다. 이제 부모님한테 돈 받기도 그렇고 달라고 해도 문제집 살 때처럼 선뜻 주시는 것도 아니고. 돈 달라고 하면 구박 할 텐데…. 이래저래 구박받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P와의 대화에서 확인했듯이 집에서 시험이 끝나 놀고 있는 고3들에게 가하는 압력은 개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다.

친구 W는 "집에 있어 봤더니 서럽기만 하더라. 그래서 귀찮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 하려고 마음 붙들어 잡고 지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3이면 이제 성인의 문턱에 자리 잡고 있건만 부모님들은 우리네를 그렇게 보시지 않고 방학 때 노는 중학생 나무라는 식으로 자식들을 대한다.

하지만 부모님들께서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은 우리는 분명 그 때보다는 훨씬 많이 자랐으며 확실히 집에서 구박받는 것이 싫다는 거다(부모님들의 편을 들며 자기들은 그런 적 없었다는 식으로 얄궂게 구는 형, 누나들도 각성해야 한다).

나 아르바이트나 할까?

좁은 집에서 가족들과 아옹다옹 싸울 바에야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사회경험도 하고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 나를 위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학교가 일찍 파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해 보겠다고 두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는 이른 시각. 그래도 대학가 앞 점포들은 점심시간 때 손님을 맞이하려 청소에 열심이었다.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안내문들이 붙어있다. 새로 생긴 편의점에서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들어가 물어보기로 했다.

S: "아르바이트 구하신다 해서 알아보러 왔습니다."
주인: "예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해서 제 안사람하고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죠?"
S: "예, 이번에 수능 봤는데요."
주인: "아, 고3이구나. 근데 어쩌죠? 나이제한에 걸리는데."
S: "편의점 일도 나이제한에 걸립니까?"
주인: "네. 술하고 담배 팔아야 하기 때문에 안돼요. 아깝네. 이제 2개월만 있으면 되는데. 우선 연락처 남기고 가시고요. 여기 명함 있으니까 가져가세요."

아르바이트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나이제한이 되는 곳이 많았다. 대학가 앞이려니 했으나 곳곳에 술을 파는 음식점이 아주 많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시간 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던 곳도 있었다. 오후 시간 점원은 모두 차서 오전 시간 점원을 구하는데 아직 우리는 학교에 가야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언제나 자신했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세상일이 다 네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 근데 그렇게 세상이란 게 만만치가 않단다"고 하신 엄마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도 아직까진 좌절보다 희망이 더 많다. 앞으로 남은 창창한 많은 나날을 위해서라도 한심스럽게 굴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 잡는다.

결국 오늘의 아르바이트 물색은 실패로 끝났다. 친구놈들과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이 영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일이 남아있다. 그래도 안 된다면 또 찾아보면 된다. 언제나 그때그때의 태양이 뜬다고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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