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통해 역사와 민족을 말하는 것이 우스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학이 역사와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장르의 예술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소설가 윤정모는 최근 장편 <수메리안>을 통해 역사와 민족이라는 문제에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11월 18일부터 그의 작품을 연재한다. 출판 전 귀한 원고의 게재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독자들에게
고대사를 여행하다보면 세 가지의 공통점을 만나게 된다. 첫째는 왕이나 영웅들의 정복기가 너나없이 아주 잔인했다는 것, 둘째는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하거나 신격화를 원했고, 셋째로는 어느 국가이던지 가장 화려한 르네상스를 꽃피운 뒤 멸망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것을 예로 든다면 이집트 문명은 물론 인더스, 황하, 그 훨씬 이후이지만 로마 역시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뒤 거의 원시인과 다름없던 튜턴인들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5천여 년 전에 탄생한 수메르라는 국가도 그랬다. 인류사상 최초로 역사시대를 열었고, 쐐기문자 발명과 도시국가건설, 각 도시간의 연방제, 민회와 장로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 왕을 선출하기도 했으며, 문학, 신학, 수학, 천문학, 12진법은 물론, 역사상 최초로 법전까지 만든 나라였다.
거대한 신전 건축도,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벽화양식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메소포타미아 건축예술의 원류가 되었고, 그 영향이 지중해 연안과 인더스까지 미쳤는가 하면 멀리 동방까지 교역을 했던 찬란한 문명 국가였다.
그러나 그런 수메르도 결국은 사직의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거의 1천년이 넘도록 근동의 등불로 타오르다가 갑자기 소멸한 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단 한 가닥의 집단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증발해버렸다.
고대의 모든 종족은 그 부침이 극심했고 이동 또한 잦아 비록 근거지에서 멀리 이탈했다 해도 지금껏 그 집단들은 현존하고 있다. 특히 인도유럽인, 아리아인과 셈어족들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데도 그들과 이웃하고 살았던 수메르 민족만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다는 흔적이 없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몇몇 서양의 고고학자들은 그 주변국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이유는 아카드인의 침략 때부터 두 종족은 융합했고, 그 뒤 점차 셈족화되어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밖에 되지 않았을까? 본래 아카드와 바빌로니아 등은 일찍부터 수메르의 문명을 차용해간 나라들이었다. 종교를 가져가 신(神)의 이름만 바꾼 뒤 자기네들 것으로 활용했는가 하면, 신화, 신화 속 인물, 함무라비 법전까지도 수메르의 것이며 성경 이야기 역시 많은 부분 수메르에서 가져갔다는 것은 이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수메르인들 스스로 자신들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며 따라서 주변 종족과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해왔다. 또한 인구도 많았다.
인구가 많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수메르는 처음부터 여러 도시국가로 형성되어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수도였던 우루크(BC 3000년경)의 인구만도 4만5000여 명이었고, 천년 후 멸망 당시, 그러니까 BC 2000년경의 수도였던 '우르' 역시 극도로 번창했던 걸 감안한다면 그간의 인구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데도 이처럼 주변과 다른 종족, 그 많은 인구가 깡그리 그렇게 타민족으로 흡수될 수도 있는 일이었을까?
이 궁금증은 우선 접어두고,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애초 어느 민족에 속했기에 자꾸만 '검은 머리의 사람들'임을 강조했는가?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이 알아낸 인종적 특징은, 1)머리카락이 검고, 2)후두부가 편편하고, 3)몸이 작달막하고, 4)근동언어와는 전혀 다른 교착 언어를 사용했으며, 5)회도(灰陶)문화와 6)순장이 강요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니까 셈어족이나 기타 근방의 민족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어디서 온 종족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다만 추정컨대 '민족 이동기에 북방에서 침략해 왔다', '어쩌면 스키타이 혹은 우랄알타이어 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좀더 근거리 추정자로는 C.H 고든(英)이 '수메르 인은 동방에서 왔다, 그들이 중·근동에 들어서기 전에 무슨 고대문자식 기호를 가지고 온 듯하다'라고 했지만 그 동방이 어딘지, 고대 기호란 또 어떤 것인지 까지는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했다.
자,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들은 '우랄알타이어? 동방? 교착어? 그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인데?' 라고 곱새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교착어는 일본과 한국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가?' 하고 자문하기도 할 것이다.
그랬다. 그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의 대답은 뜻밖에도 한국에 있었다. 즉 그들은 동이족이나 혹은 환인의 자손이었고, 민족 이동기에 그렇게 내려갔다는 것이다. 또한 '수메르'라는 그 국호 역시 '소머리'에서 변형되었으며 그 어원은 동이족이 태동했던 성스러운 하늘의 강(송하강)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밖에도 여러 갈래의 민족이동 설 혹은 사상유통설이 있다. 첫째는 서에서 동으로 유통되었다는 조지훈설이 있고 둘째는 동에서 서로 유통되었다는 문정창, 김은수, 송호수의 주장, 또 근래에 와서는 환웅족이 그리스로 건너가 황금가지 시대를 열었다는 박용숙의 저술까지 있다.
그중에도 문정창씨는 수메르의 개국영웅 엔릴(릴은 신이라는 뜻)조차도 동이, 즉 소호족이었다고 주장했으며 그 예증까지 들어가며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주장들이 독특하고 또 흡인력을 가진 것은 우리의 고기(古記)에도 분명히 수밀국과 우르국이 명시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환국은 12개국(민족분포도?)으로 동서가 2만리고 남북이 5만리며, 그중엔 수밀이국도 있다'고 했으니 페르시아 만 근처에 있었던 수메르가 수밀이국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자,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금부터 나는 수메르 이야기를 펼칠 것이다. 그것도 동이족이 건너가서 이룩한 고대사 이야기를. 그들의 역사와 영웅들의 삶, 영생을 바랐던 영웅호걸 길가메시, 진시황제보다 훨씬 먼저 불로초를 구하러 다니는 둥, 너무 많이 가진 탓으로 넘치게만 살다간 그 영웅과 백성의 풍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목부 왕 두무지,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우루카기나, 하지만 그는 너무 조금 가지고 너무 늦게 왔고 그러므로 10년을 채우지 못한 채 결국 아카드의 침략에 빌미가 되고 말았던 비애, 그러한 역사 속에서도 교착어를 고스란히 지켜온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져간 표의문자(일본학자 우에노-上野景福-씨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는 동이족이 사용하던 팔괘부호와 흡사하다고 증언했다.=출처 '한민족의 뿌리사상')를 소리 설형문자로 바꾸고 가다듬었으며, 1천여 년간 한 가지 언어를 지켜왔다.
물론 아카드의 사르곤 왕에게 지배되면서 말이 혼합되긴 했어도 그들은 다시 일어나 검은 머리 사람들의 나라, 그 언어를 부활시켰고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지구라트, 그 성탑을 세웠다.
신들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높은 성탑을 세우고, 그 품 아래서 영원한 보호를 받기 위해 날마다 기도를 올렸던 그들, 그럼에도 끝내는 야만인 아모리족(엘람과 수사의 침략으로 멸망했다는 주장도 많다)의 침략으로 그 고도의 문명국가도 종국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필자는 여기까지, 그러니까 우르 3왕조의 마지막 왕, 그 시대까지의 이야기만 들려주겠다.
한데 이 무슨 우연인가. 그 성탑이 세워졌던 우르, 걸프 만 근처의 고대국가 그'우르'가 지금 다시 폭격을 당하고 있다. 4천여 년 전 그날처럼 울음이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십 만 점의 점토와 도자기 등 그들의 유품들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유품까지도 사라져야 했던 운명이었을까? 아, 잊을 뻔했다. 우리의 고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7월에 우르인들이 투항해왔다(돌아왔다?). 그들에게 염수 근처 땅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자, 이제 출발을 서두르자. 갈 길이 멀지 않은가. 단번에 5천 년 전으로 달려가기가 너무 벅차다면 까짓 것 1천 년쯤 줄여버리고 거기서 잠깐 발길을 멈추자.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시 보게 될 것이다. 4천여 년 전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양으로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음을.
진종일 수메르의 애도가를 읽은 날.
윤정모.
| | 소설가 윤정모는... | | | | 1946년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에는 여성중앙 중편 공모에 <바람벽의 딸들>이 당선됐다.
창작집으로는 <밤길> <님> <빛> <딴 나라 여인> 등이 있고, 장편소설 <나비의 꿈> <그들의 오후> <꾸야삼촌> 등을 상재한 바 있다.
2001년에는 산문집 <우리는 특급열차를 타러간다>를 통해 개인사를 진솔하게 고백해 많은 독자들의 격려를 받았다. 1988년 신동엽창작기금 수혜자이며, 단재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해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선출됐으며, 현재 인천에서 집필에 전념중이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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