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왕 이비 신

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

등록 2003.11.19 14:23수정 2003.12.2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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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통해 역사와 민족을 말하는 것이 우스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학이 역사와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장르의 예술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소설가 윤정모는 최근 장편 <수메리안>을 통해 역사와 민족이라는 문제에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11월 18일부터 그의 작품을 연재한다. 출판 전 귀한 원고의 게재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편집자 주>

수메리안


검은머리 사람들-(상)

마지막 왕 이비 신


지난 밤 '달의 신' 축제가 있었다. 그 신의 신전인 에키슈누갈에서였다. 달의 신 난나는 수도 우르의 수호신이기도 해서 그 축제는 매달 성대히 열렸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요직인사들, 상원, 하원들은 물론 장군들과 수많은 귀족들도 참석했다. 춤과 노래와 연주도 끝없이 이어졌고 잘 익은 포도주는 참석자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시인들도 축사를 잊지 않았다.

위대한 엔릴께서 달의 신 난나를 낳으셨지.
달의 신 아내는 닌갈,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
우르가 번창한 것은 그 수호신들 덕택이지.
우르, 우리의 수도는 그것을 알고 있다네.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이날 왕은 그 행사가 더없이 흡족했다. 자기 신하들이 즐거워하는 것도 보기 좋은데다 가무는 물론 칠현금 연주도 그 어느 때보다 감미로웠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향기로운 포도주조차 흥취를 배가해 왕은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셨고, 그래서 축제가 끝나고 침소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반쯤은 인사불성이었다.

새벽이었다. 누군가가 왕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도 잠결인 왕은 담요자락이 입술을 덮은 것으로 여기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왕은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다음 순간 털퍼덕, 하고 다시 침대에 앉혀졌다. 앉혀지자마자 오랏줄이 어깨를 감아댔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묶고 있었다. 거구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오랏줄을 빙빙 돌려가며 왕의 어깨를 꼼꼼히 묶었다. 벌써 손과 발도 그렇게 다 묶여 있었다.

왕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꿈이거나 꿈속에서 어떤 불쾌한 놀이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꿈속이라 해도 불쾌한 놀이는 질색이었다.


한 사나이가 술 단지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확실히 이상한 게임이었다. 왕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섯 명의 거구들이 진을 쳤고 그들이 든 갈고리 창이 불빛에 비쳤다.

'역시 꿈이군.'


왕은 생각했다. 그 갈고리 창은 얼마 전에 자신의 군장이 최초로 발명한 것이었다. 한번 찌르면 거대한 황소도 절명시킬 수 있는 최신형이라 아직은 그 어느 국가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뿐이냐..'

왕은 생각을 이어갔다. 일년 전엔 독을 묻히지 않아도 스스로 독이 되는 쇠를 발명해 수만 발의 화살촉까지 만들어 두었다. 시험 삼아 사냥을 해보았을 때 그 화살은 확실히 그 어떤 쇠살보다 빨랐고 또한 짐승의 살갗에 꽂히는 순간 곧 절명해버렸다.

'게다가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있다….'

한 사나이가 다가들어 왕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우악스런 손아귀로 왕의 양 볼을 누르자 입이 물고기처럼 벌어졌다. 술 단지를 든 사나이가 왕의 입에 술을 붓기 시작했다. 하인들이나 마시는 시큼한 포도주가 목을 타고 절로 넘어갔다.

술 단지가 비워지자 다시 왕에게 재갈이 물려졌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나이가 왕을 들쳐 업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회랑 쪽을 지나치면서 왕은 그 바닥에 집사장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왕에게 비보를 알리려고 달려오다가 창에 찔린 것이었다. 왕은 또 보았다. 원로 의회실 앞에서 최고 의회장이 원주에 묶인 채 죽어 있는 것을.

그밖에도 많은 궁정지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꿈일 것이었다. 거기서부터는 군사들이 창을 들고 즐비하게 서 있었으나 모두 갑옷을 착용했고 그것도 단순한 가죽이 아닌 쇠붙이까지 붙여진 것이 자기 군사들임에 틀림없었다. 왕은 이제 이 짓궂은 꿈이 어서 빨리 끝나주기만을 소망했다.

궁정 앞으로 나오자 거구의 사나이는 왕을 수레에 내려주었다. 자신의 마차가 아닌 가축용 수레였다. 말도 이미 묶여 있었고 호송원들이 그 말에 멍에를 채우기 시작했다.

왕은 사방을 두릿거려 보았다. 궁정 앞 연못 앞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군사들이 내전의 물건들을 꺼내다 그 마차에 차례로 싣는 중이었다. 몇 개의 수레에는 벌써 진귀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한 군사가 가슴 가득 보물을 안고 계단을 내려오며 소리쳤다.

"금붙이, 은붙이가 아주 많아!"

왕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니었던 때문이다. 만약 '금붙이'라는 말만 알아들었더라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그 금붙이라면 왕비가 마련해둔 것들이었다. 사후 분묘 치장 때 쓰기 위해서였다. 분묘는 지하세계라 금을 많이 넣어두어야만 빛과 영광이 영원하다고 왕비는 믿고 있었다. 또한 지하세계의 빛은 광물의 젖줄과도 같아서 수메르에 부족한 것들, 그러니까 철과 돌과 보석들을 키워낸다는 것이었다.

"와아!"

술기운에 꾸벅꾸벅 졸던 왕은 그 고함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벌써 수레는 궁정문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수레 양 옆으로는 수많은 군사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대며 궁정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왕은 놀라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적군이었다. 양가죽 갑옷에 같은 모자를 쓴 그들은 북방 유목민 군졸들이었다. 왕은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렸다. 성은 함락되었고 자신은 지금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신전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동안, 그 밤을 틈타 야만인들이 급습을 한 것이다,

"나의 군대는, 군사는 다 어디로 가고…."

왕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본래 왕은 자기 군대에 대한 대단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와 최신 무기를 갖춘 왕이노라고 뽐내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의 군대는 수천 대의 전차와 방진 병, 한번에 수십 발의 활을 쏠 수 있는 노포부대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막강했던 도시국가가 단숨에, 그것도 한갓 야만인들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았다면 억울함이 먼저 그의 목을 조였을 것이다.

왕을 태운 수레가 부유촌을 지나갔다. 천연색 벽돌로 잘 지은 주택들은 저마다 대문이 꼭꼭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 쪽 상점거리는, 전 세계의 수출입품이 넘나들던 화려한 상점거리는 거의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문은 부셔졌고 그 속의 물건들은 약탈당했으며 더러는 가게를 지키던 주인이 죽어 있기도 했다.

오일 가게 앞엔 기름이 흥건하게 쏟아져 있었다. 왕을 태운 수레가 미끄러질 뻔 하자 호송원들이 수레를 바로세우며 심한 욕설을 했다. 즉 수레가 미끄러진 것은 기름 탓이 아니라 왕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수레가 맥주집 앞을 지나갔다. 왕이 필경학교를 다닐 때(우르 3왕조의 왕자들은 모두 귀족들이 다니는 필경학교를 다녔다. 그것은 할아버지 슐기 왕 때부터 왕손에게 주어진 교육방침이기도 했다) 동창 녀석들과 가끔 들르던 곳이었다. 한데 그 정다운 맥주 집도 불타버렸고 그 앞엔 한 여성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 시체는 여성이 아닌 왕의 동창생 슈였다. 필경학교 전 교장의 아들이기도 했던 슈는 여신 이난나의 신봉자이며 그래서 늘 의상도 여성 차림을 선호했다.

왕이 왕자였을 때 슈는 곧잘 그에게 가발과 여성 옷을 입히고 맥주 집까지 안내했고, 졸업 후에는 그 술집을 인수받아 스스로 경영해왔다. 한데 그가 죽어 있었다. 만약 왕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적들에게 저항하다 온통 칼집 투성이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면 아마도 또다시 졸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문이 다가왔다. 성문을 지키던 적병들이 끌려가는 왕의 수레를 향해 침을 뱉었다. 왕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또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침을 뱉는 것은 패배한 왕에 대한 침략자들의 버릇이었다.

수레가 성밖을 벗어났다. 벌써 해가 떠올라 저만치 언덕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곳은 전투장이었다. 우르의 군사들이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전멸한 곳이었고, 부서진 전차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군장이 침략 보고를 받은 것은 축제가 한창 무르익던 무렵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기백 명의 유목민들이 성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인원수도 별것 아닌데다 또 유목민들이란 종종 그런 식으로 몰려와 성밖 마을을 약탈해가기도 해서 군장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는 축제 중이었다. 그것도 우르가 떠받들고 있는 수호신 축제였다. 하필이면 그런 날에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군장은 신전을 빠져나가 당장 병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병영엔 군사들이 별로 없었다. 축제가 있는 날이라 모두 집으로 간 것이었다.

군장은 남아 있는 군사 3백여 명을 끌어 모아서는 한밤중에 전차까지 대동해서 현지로 나왔던 것이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만약 적들의 전략을 알았더라면, 그것은 다만 군 수뇌부의 유인작전이었고 이미 수많은 적들이 바로 성벽에 거미줄처럼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기만 했더라도 우르 3왕조가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씨 또한 우르의 편이 아니었다. 보름이라 달의 신 축제를 성대히 열었는데도 달은 구름 속에서 잠을 자는지 통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바람조차 없어 두꺼운 구름장만 하늘을 채웠다.

때문에 기백 명인 줄 알았던 적들이 뒤에서부터 인의 장막으로 덮쳐들었을 때는 이미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잊은 것이다. 야간전투는 침략자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그랬다. 아모리 인들은 본래 코카사스 지방에 근거를 가졌으나 일찍이 시리아로 내려온 유목민들이었다. 그들은 별자리를 따라 양떼를 몰고 사막과 고원지대로 이동하면서 살아왔고, 초원도 사라지는 겨울철이면 약탈을 일삼았다. 사마르칸트나 중앙아시아로 교역을 다니는 대상들을 터는 것도 주로 겨울철 밤이었다. 말하자면 밤의 침략이 그들에겐 일종의 전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들도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초원은 푸르고 가축도 늘어났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정착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봄은 그들에게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산악의 눈은 녹기는커녕 점점 더 그 두께를 더했고 초원의 풀은 돋을 생각도 하지 않아 양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더욱이 사막의 밤 기온은 끝도 없이 곤두박질 쳐서 천막 속에 있어도 손과 발등이 터졌다. 바람 또한 거세어서 천막이 날아가는가 하면 추위와 굶주림에 양들이 죽어갔다.

이제 부족들에겐 항구적인 안정이 절실했고 그 방법 또한 지금껏 다른 유목민들이 그래왔듯 남의 국가를 빼앗아 그 영토에 정착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르를 치게 된 것이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유목민들이 부러워하는 지상낙원이었다. 강이나 바다에는 수출입 배들도 줄을 잇고 세상의 모든 진귀품들이 그 배들로 오고 가는가 하면 동부 지중해 제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삼나무도 실려 온다고 했다. 농토 또한 잘 발달된 관개수로 덕에 해마다 풍년이며 들엔 포도와 대추야자가 풍성히 열렸다. 꿀과 우유, 버터의 생산도 풍부해 가뭄이나 홍수가 찾아와도 전 백성들이 일년은 버틴다는 곳이었다.

아모리 인들은 그 침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우르의 막강한 군사력은 예고 없는 급습으로, 그들이 뽐내는 최신화된 병장기는 인의 장막으로 막거나 덮어씌운다는 전략이었다. 그 작전에 머릿수를 채워줄 주변국들도 있었다. 엘람과 수사였다.

그 두 국가는 수메르와 이웃하면서 오랜 세월 분쟁해온 터라 그들의 군사요청에 쉽게 동의해줄 것이었고, 예상처럼 또 그렇게 되었다. 연합군을 내주는 조건 또한 크게 까다롭지 않았다. 수사에서는 탈취한 부의 일정량을, 엘람에서는 우르 왕의 생포만을 원했다.

사실 엘람으로선 수메르에 원한이 많았다. 수백 년간 싸워 왔지만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고 번번이 참패만 당해왔다. 그래서 엘람 왕은 자기 손으로 그 숙적을 제거함으로써 그간의 치욕을 씻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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