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치는 지리산 '도올'을 아십니까

지리산 기행1-김재원씨의 지리산 정착기

등록 2003.11.19 07:48수정 2003.12.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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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도올'을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엉거주춤하게 활개를 치는 걸음걸이도 그렇거니와 짧은 머리에 입을 약간 삐죽거리며 말을 내어 뱉는 모습도 영락없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다.

지리산 '도올' 재원씨와 친구가 된 윤보혁 피아골수련원장
지리산 '도올' 재원씨와 친구가 된 윤보혁 피아골수련원장김대호
"천장으로 들쥐가 한 마리 들어 왔는데 이놈이 밤만 되면 부스럭거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거기다가 얼매나 약삭빠른지 잡을 수는 없고 딱 미치겠더라고. 그러다 그래, 너는 천장에 살고 나는 방에 살고 서로 침범하지 말고 살자. 마음을 고쳐 먹으니 '바스락' 소리도 들을만 하데."


이 속 편한 사람이 지리산 '도올'로 통하는 김재원(44)씨다. 재원씨는 하동 화개장터에서 불과 1㎞ 거리인 섬진강변에 산다. 말이 강변이지 급경사인 산길을 한창 올라야 하니 엄밀히 말하면 산사람이다.

손님들을 위해 처마 밑에 달아 놓은 곳감, 곳곳에 이빨이 빠졌다.
손님들을 위해 처마 밑에 달아 놓은 곳감, 곳곳에 이빨이 빠졌다.김대호
재원씨는 섬진강과 지리산에서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연병장은 계곡과 돌산을 타고 자유롭게 자라나는 야생 녹차 밭이며 그 병사들은 '꿀벌'로 피아골의 골짜기 꽃이란 꽃은 다 찾아다니며 진을 치고 있다. 이쯤 되면 그의 고향 친구들이 그를 지리산 총사련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전이 고향인 재원씨는 개그맨 김정렬씨의 친조카다. 그의 삼촌도 그의 지리산 생활을 못내 부러워 한다고 한다. 섬진강변 도로포장 공사 현장에서 중장비를 운전하던 재원씨는 지리산 처녀 송복순(40)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송씨의 고향 풍광에 푹 빠져 화개장터 인근 강변 산중턱에 집을 지었다.

섬진강변 산중턱에 지은 재원씨의 보금자리
섬진강변 산중턱에 지은 재원씨의 보금자리김대호
재원씨는 이 집에서 장남 광현(18·구례고)과 큰딸 시내(16·구례중), 셋째 은비(13·구례중앙초)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 얻은 늦둥이 현(3)이와 산다. 아들 광현이는 집안 돌림자를 사용했지만 큰딸은 집 뒤를 타고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시내를 보고 셋째는 새싹을 틔우는 은빛 봄비를 보고, 늦둥이는 녹차 덖는 무쇠 솥을 보고 솥귀 '현(鉉)'자를 썼다.

근방에는 이웃이 없다 보니 아이들의 놀이터는 자연히 산이 되었고 간식도 머루, 밤, 다래, 감 같은 산열매들이다. 특히 재원씨의 3살 박이 현이가 걸물이다. 멀리서 "아저씨 메롱"을 연발하던 녀석이 찻상을 벌여 놓자 달려와 다관을 들고 제법 팽주를 자처한다. 젖 떼면서부터 마시기 시작한 녹차 때문인지 그 흔한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이 튼튼하고 피부도 야무지다. 컴퓨터부터 배우는 도회지의 아이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재원씨 늦둥이 현이 '다관 뚜겅이 날아가도 차는 따른다'
재원씨 늦둥이 현이 '다관 뚜겅이 날아가도 차는 따른다'김대호
세상에서 가장 어린 팽주 3살 현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팽주 3살 현이김대호
현이에겐 친구가 많다. 산에 놓아 키우는 염소를 비롯해 진돗개 백구와 최근에 낳은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뒤뜰 개울에 아빠가 풀어 놓은 참붕어와 가재, 다슬기도 친구다. 가끔 쏘여 심통이 나기도 하지만 벌과 나비, 개구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따금 언니 오빠에게 떼를 써서 내려가 보는 섬진강 백사장도 훌륭한 놀이터다.

진돗개 백구가 굴을 파고 낳은 새끼에게 일광욕을 시키려는 재원씨
진돗개 백구가 굴을 파고 낳은 새끼에게 일광욕을 시키려는 재원씨김대호
얼마 전 재원씨는 선거를 치렀다가 참패했다. 정치 출마 같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고 애들 교육 문제를 걱정하던 차에 도회지로 나가자고 가족 투표를 실시했었다. 그런데 셋째 은비만 아빠 편을 들었고 나머지는 엄마와 한통속이었다. 그는 속으로는 아빠를 믿어주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는 마음이었지만 '니들이 안 간다고 했으니 학교 갔다와서 집안 일을 도와라'하고 괜스레 거짓 심통을 부렸다. 복순씨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도시의 엄마와는 다르다.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그래도 여기처럼 아이들을 튼튼하고 풍족하게 키울 곳은 없을 것 같아요. 지들도 좋아하고 나도 도시에선 숨막혀서 못살 것 같아요. 인터넷도 설치해 주었는데 공부하는 데 외에는 거의 쓰질 않아요. 엄마 아빠 거들 줄도 알고 도시 사람들도 나름대로 행복하겠지만 우리도 이만 하면 행복하지 않나요?"

재원씨는 자신이 산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바람 솔솔 스며드는 산중턱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신선 노릇이나 해 보려는 치기로 산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 주변에 서식하는 야생 녹차를 정원에 옮겨 심고 지인들과 나눠 먹었는데 차 맛이 입소문으로 번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져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녹차밭은 잡초투성이다. 그래서 마니아들이 많다.
그의 녹차밭은 잡초투성이다. 그래서 마니아들이 많다.김대호
그렇다고 재원씨가 기업농처럼 수만 평의 녹차밭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차밭은 800∼900평 남짓이고 한봉이 60통, 염소가 8마리 정도이니 농사치고는 소담하다. '내 손으로 재배하고 만들 만큼만'이 그의 소신이다. 판매도 그의 차를 좋아하는 마니아들과만 한다. 한번은 유명한 모 쇼핑몰에 세작을 2만원씩 공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쇼핑몰이 소비자들에게는 '할인된 가격'이라며 4만5천원에 판매하는 것을 보고는 손해를 감수하고 거래를 끊었다. 그 뒤론 단골들과만 거래하고 장사치들과 인연도 끊었다.

"도시에서 살아본 사람이지만 서울이라도 갈라치면 기차에서 내릴 때부터 역한 공기에 기분이 상한다. 나도 산을 제법 타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달려가야 걸음을 따라 잡을 수 있다. 저 속에서 밥은 다 먹고살까 걱정도 되고 낮엔 텅 비었다가 밤만 되면 흥청거리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이것이 지리산 도올 김재원씨의 도시 사람에 대한 소회다.

기자에게 싸 줄 대봉을 따는 재원씨
기자에게 싸 줄 대봉을 따는 재원씨김대호
재원씨는 "산처럼 솔직한 게 없는 것이, 내가 일한 만큼 보내 준다. 산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보여 주는 대로 믿으면 된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나에겐 "눈으로 보는 세계는 가장 에러가 날 확률이 높다. 눈으로 보는 세계는 가장 천박한 것이다"라고 말한 도시의 도올 선생보다 지리산의 도올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재원씨가 싸 준 뇌물(?)을 염치 없이 한 보따리 받아 들고 왔다. 간에 좋다는 허깨차와 대봉 홍시, 그리고 무안군 승달산 월선리 예술인촌에 옮겨 심을 야생차 씨앗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더욱 큰 것은 산사람만이 가지는 너른 가슴과 나눠 주는 정이었다. 도시를 버리고 지리산을 선택한 재원씨 가족이 지금처럼 한없이 자유롭고 풍요롭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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