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

등록 2003.11.23 11:05수정 2003.11.2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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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후는 도서관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만약 그 안에 누가 있다면 확인해볼 참이었다. 나의 신랑이었던 그분은 지금 안녕하시지요? 이난나 여신을 기쁘게 해주셨던 이 땅의 왕인 그분은 지금 어전에 납시어 집무를 보시고 계시지요?

도서관은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사제들이 앉아 독서를 하거나 담당 사제가 점토판을 바구니에 담거나 그 바구니를 선반에 올리는 둥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닌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다. 이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것이다! 닌후는 다시 작업장으로 가보았다. 작업장 역시 비어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조각가만이 구석에 앉아 섬록암을 조탁하고 있었다.

"다른 장인들은 어디에 계신가요?"
"출근하지 않았소."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요?"
"그렇다고 들었소."
"궁정은 안전한가요?"
"잘 모르오. 난 몹시 바쁘니 그만 어서 나가보시오."

조각가는 다시 망치질을 했다. 그 검은 돌덩이는 이비 신 왕의 좌상으로 태어날 것이었다. 대사제장은 집에도 가지 말고 조각을 끝내라고 했지만 그는 그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곱 시간 후 적들이 몰려와 사제관을 접수해버렸고 따라서 마지막 왕 이비 신은 자신에 대한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검은 머리 사람들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닌후는 사제관 밖으로 나왔다. 곧장 여사제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간들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닌후는 궁정 쪽으로 향했다. 가서 먼 발치에서라도 동태를 살피고 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궁정은 만신 전 성탑 부근에 있었다. 따라서 성탑 꼭지를 보고 따라가다 보면 청록색의 궁문이 나올 것이었다.


저만치 궁정 문이 보였다. 전에 없이 군사들이 궁정 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창을 들었고 투구까지 쓴 것이 살벌해보였다. 닌후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청록색 두 탑으로 세워진 궁정 문은 예나 같았다. 하지만 그 탑을 가로지른 층층의 노대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창을 들고 서서 밖을 감시하고 있었다. 궁문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누런 양가죽 모자를 쓴 것이 분명 이 나라 군사는 아니었다.


닌후는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그때 마침 마차와 함께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오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닌후는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거기엔 보석가게를 운영하는 부자 친척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 대문은 부서졌고 집안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거리도 텅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머리를 산처럼 올리거나 리넨의 터번을 쓰거나 높고 둥근 모자 위에 다시 주름 숄을 걸치는 둥 최신 유행을 자랑하는 귀부인들이 오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한데 지금은 거리가 썰렁했고 그 빈 거리엔 개들만 서성이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닌후는 걸음을 빨리 해 중앙 거리로 내려갔다. 그 넓은 거리엔 각기 신이 다른 여러 예배소가 있고 그 맞은편엔 우르 남무 왕의 기념비와 법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만 백성이 보고 따르라고 그렇게 세워둔 것이었다.

그 중앙거리도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예배소를 찾는 사람들, 짐을 기다리는 나귀들로 시끌벅적할 텐데도 지금은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닌후는 차근차근 주위를 살펴 보았다. 비석 앞에 한 조그만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닌후는 그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딱 한번 본 적이 있는 궁정의 음유 시인이었다. 닌후는 곧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비 신 왕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노인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람으로 가는 강을 건넜다오."
"언제 돌아오시는가요?"
"신들이 우르를 떠난 것이오. 우리의 가엾은 왕은 버림을 받은 것이오."
"그러면 왕비와 왕자께서는…."
"궁정 안에 잡혀 있다고 들었소. 해가 질 때 참수를 할 것이라고…."

닌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왕비도 잡혀 있다면 왕은 혼자 끌려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가서 그 수발을 들어야 했다. 닌후는 뛰기 시작했다.

강이 가까워지면 갈대밭이 많다. 수메르의 도시엔 어디에나 그렇게 갈대밭이 많았다. 사람들은 갈대로 바구니도 만들고 피리도 만들고 그것을 쐐기형으로 깎아 필기용으로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갈대밭을 싫어했다. 해가 질 무렵이나 바람이 불면 갈대들은 슬프게 울기 때문이었다. 갈대로 만든 피리도 그랬다. 그것은 전혀 경쾌한 음률을 쏟아낼 줄 몰랐다. 마치 어미 잃은 고아처럼, 송아지처럼 슬픈 소리만 흘려낼 뿐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왕 슐기께서, 그 이비 신 왕의 할아버지께서, 음악의 후원으로 찬란한 업적을 이룬 그이께서 갈대 피리만은 금지시킨 것이었다.

그 피리소리는 백성들에게 기쁨보다 슬픔을 줄 것이기에 궁정에서는 그 누구도 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그 손자 대에 와서 종국을 고하고 말다니. 당신은 당대에 모든 것을 이루고 성벽을 튼튼히 했고, 날마다 그 높은 성탑에 올라 신들에게 경배를 드렸고, 멀리 떨어진 니푸르의 성역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단장을 했건만 어찌하여 그 신들은 수메르를 떠나고 있는가?

닌후는 갈대밭 옆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왕이시여, 내가 님을 만날 때까지 부디 무사하소서. 부디…."

언제인가 닌후는 생각해두었다. 달이 밝은 날, 왕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오던 날, 닌후는 왕의 사후를 생각해보았다. 언젠가는 왕도 가고 말 지하세계, 그 분묘를 생각했다.

"님이시여, 저는 이미, 이미 이렇게 생각해두었나이다. 님께서 지하세계로 가시는 날, 그때라면 이 닌후는 님의 얼굴을 맘껏맘껏 볼 수 있으리라고.

닌후는 칠현금을 들고, 님께서 주신 청금석 목걸이를 걸고 오, 님께서 주신 은 인장을 가슴에 품고 닌후는 기꺼이, 기꺼이 님의 뒤를 따르리이다.

집전자가 포도주를 줄 때면, 영원히 잠드는 그 포도주를 건네받을 때면… 님이시여, 그때 허락해주소서. 님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소서. 비록 님의 곁에는 누울 수 없다 해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포도주를 마시면, 그 포도주는 닌후에겐 꿀보다 더 달콤할 것이외다. 님의 곁에 누워 님과 함께 영원히 잠들 수 있게 하는 그 포도주는 닌후에겐 님을 향한 사랑의 미약이나이다.

님이시여, 님이시여, 왕비님도 따라가지 못할 그 자리, 그때 그 자리를 이 닌후가 대신하겠나이다. 기꺼히 그렇게 하겠나이다. 그것은 이 닌후에겐 최후의 영광, 닌후는 그 영광을 가질 자격이 있사옵니다. 닌후는 당신의 신부, 당신의 신부….

설령 님의 곁에는 눕지 못한다 하여도, 님의 발치에 눕는다 하여도 닌후는 당신의 신성한 신부…."

강에 닿았다. 삼나무 뗏목은 강 저쪽에 매여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배도 뗏목도 뱃사공조차도.

닌후는 날이 저물어갈 때까지 그렇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어떤 배도 오지 않았다. 닌후는 하늘을 쳐다보며 달을 찾았다. 오늘도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달의 신조차도 수메르를 떠나버렸는지 몰랐다.

바람과 함께 어둠만 싸여올 때 닌후는 더 기다릴 수 없어 강으로 뛰어들었다. 헤엄을 쳐서라도 가야 했다. 어서 가서 목마른 님에게 물 한잔이라도 바쳐야 했다. 닌후의 몸이 사라졌다. 강을 건넜는지 아니면 물살에 떠내려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수메르 사람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그녀가 왕의 뒤를 따라갔노라'고.

그것은 그들의 세계관이었다. 지하세계보다 못한 그 가시밭길을 차마 왕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닌후를 동무삼아 딸려 보낸 것이었다. 그것이 군주를 잃은 백성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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