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진행되는 '나고야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후 변론을 위해 떠나는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 피해의식으로 아직도 카메라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 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국언
"부모가 알면 못 가게 할까 봐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서야 가르쳐 줬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부모님은 기차가 출발 할 때서야 제 모습을 봤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는 일본 교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이 25일 나고야 출발에 앞서 광주유족회 사무실에 모였다. 낯설고도 먼 땅 일본 나고야는 할머니들의 젊은 청춘을 송두리째 앗아간 한이 서린 곳이자, 지금도 천형처럼 이들의 상흔이 배인 곳이다.
양금덕(광주·73) 할머니가 일본 교장 말에 속아 일본으로 떠난 건 1944년 5월.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징병, 징용, 노무자,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없던 시절, 배고픔을 달래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말은 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나주 대정 국민학교에서만 이렇게 24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모두 13∼16살 소녀들이었다. 나주, 목포, 순천 등 전남에서 141명, 충남 138명 등 군수업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에 끌려온 조선 여성만 약 400여 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을 당하고도 월급 한 푼 받아 보지 못한 이들은 그날그날 허기를 달래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길가에 버려진 수박껍질을 주워먹다 배탈로 고생하고 허망한 줄 알지만 배고픔을 잊기 위해 수없이 물을 들이키기도 했다.
"부모님한테 편지 한 통 쓰지 못했습니다. 감시 때문에 어렵기도 했지만 좋은 소식이라면 모를까 내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차마 그 얘기를 어떻게 부모님께 쓰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