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한 녹청자 완(접시). 태토를 수비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표면이 거칠거칠 한데, 그것은 옛날 사람들이 수비(물에 개어 모래 등의 거친 입자를 걸러내는 작업)하지 않고 그대로 써도 되는 정도의 좋은 흙은 다 퍼다 써 버려 지금은 이 정도의 거친 흙 밖에 구할 수 없기 때문.오창석
비색(翡色)의 청자가 고급스럽고 귀족적이며, 찬 느낌을 주는 반면 녹갈색이나 암갈색, 황갈색을 띤 녹청자는 서민적이며, 투박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과거에는 녹청자의 조형과 색상이 청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불량품이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청자기술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의 과도기적 상태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현재의 연구로는 고려초기에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시기 동안 사용된 독자적인 영역의 자기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통일신라시기 창건된 전남 승주의 송광사에서는 1987년 3만여점의 고려 시기 녹청자 파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대접, 접시, 완 같은 반상기(飯床器)류의 생활용기 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경기도 용인에서 발견된 관원이나 지방 부유층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석곽묘에서 발견된 녹청자 등도 청자가 당대 왕실과 귀족의 것만이 아닌 중산층까지 사용하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생활용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대량생산이 불가피했던 녹청자는 겹쳐 쌓아 굽기 위해 그릇 안쪽 바닥에 내화토를 발랐던 흔적과 아울러, 모래 등이 섞인 거친 태토를 곱게 거르지 않고 바로 사용함에 따른 거친 표면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녹청자 고유의 독특한 색은 이곳 해남 산이면의 태토만이 가진 철분의 높은 함유량 때문으로, 다른 곳의 흙을 재료로 쓰면, 유약과 가마의 온도를 달리 한다고 해도 동일한 색상을 절대 얻을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