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준서'와 '은서'도 모르는 한국인이다

[까탈이의 세계여행 - 미얀마 1] 비에 젖은 양군

등록 2003.12.08 18:44수정 2003.12.12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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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을 돌로 빻으며 거리에서 맨발로 놀고 있는 아이들.
꽃잎을 돌로 빻으며 거리에서 맨발로 놀고 있는 아이들.김남희
연착으로 악명 높다는 방글라데시 항공은 역시나 출발 예정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서야 방콕을 이륙했다. 방콕에도 비가 내리더니 미얀마의 수도 양군도 비에 젖고 있다.

미얀마를 여행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얀마의 국가 상황 때문이다. 1962년 르 윈의 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을 계속해 온 국가 평화발전 위원회(SPDC)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군사 독재정부이다.


따라서 외국인 여행자들의 미얀마 여행이 미얀마의 민주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측과 그렇지 않다는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왔다.

반대하는 측은 외국인 여행자들의 여행이 결국은 군부 독재를 승인하는 형식이 되고 만다는 것, 또 여행자들이 공항에서 강제 환전하는 돈이 바로 군사정부가 달러를 얻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이유를 든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잘 알려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지 여사는 공개적으로 미얀마가 민주화될 때까지 미얀마 여행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반면에 외국인 여행자들이 미얀마의 민주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측은, 어린이 노동이나 여성의 인권,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노동력 동원 등의 문제가 외국인 여행자들의 눈을 통해 세계적인 이슈로 재등장해 군사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음을 예로 든다. 수지 여사가 이끄는 야당 내에서도 많은 인사들이 이런 이유로 외국인들의 미얀마 여행에 찬성하는 입장을 펴고 있다.

전통 옷인 론지를 입은 미얀마 남자들이 짐을 나누어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
전통 옷인 론지를 입은 미얀마 남자들이 짐을 나누어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김남희
전 세계 배낭 여행자들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가이드북 론니플래닛의 미얀마 편 첫 페이지 역시 "우리는 가야만 하는가"라는 글로 시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얀마를 여행하기로 결심하는 일부터 쉽지 않고, 또 일단 여행을 시작한 후에도 계속되는 주의와 고민이 뒤따른다. 즉 미얀마에서 쓰는 돈이 군사정부로 들어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급적 최소한의 돈만을 FCE(외국인을 위한 화폐·Foreign Currency Exchange)로 환전하고, 정부 소유의 숙박 시설과 교통 시설을 절대로 이용하지 않는 등의 가이드 라인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한다.


1, 2불에 핏대를 올리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생활을 해 온 배낭족인 나 역시 항공권을 구입할 때 이런 이유로 국영 미얀마 항공 대신 더 비싼 비만 방글라데시 항공을 선택하느라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듣던 대로 미얀마에 대한 인상은 공항에서부터 구겨진다. 모든 외국인이 의무적으로 200불씩 환전해야 하는 외국인을 위한 화폐(FCE:Foreign Currency Exchange)때문이다. 이 FCE는 정말 터무니없는 화폐인데, 숙박료와 관광지 입장료, 국영버스나 국영철도 표를 끊을 때에나 쓸 수 있다. 또, 환율이 터무니 없이 낮아 손해를 보기 일쑤인데다가, 군사정부로 고스란히 들어가는 돈이기에 모든 외국인들이 최소한의 금액을 환전하고자 한다.


당연히 공항에서는 이런 점을 이용해 뇌물을 요구한다. 한 나라의 수도에 있는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공항 직원이 귓가에 대고 "100불만 바꿔줄 테니 나에게 조금만 선물을 줘"라며 뇌물을 요구하는 말을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불쾌해지는지.

거리에서 간판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 미얀마의 글자 역시 독특하다.
거리에서 간판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 미얀마의 글자 역시 독특하다.김남희
환전을 하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니 불쾌함이 배가 된다. 일본인 친구가 가려는 숙소와 내가 가려는 숙소가 멀리 떨어져 있다며 1인당 2불씩 달라고 해서 달라는 대로 줬는데 내려보니 엎어지면 코가 닿는 거리다.

게다가 글로벌 식당에 내려 그곳이 게스트하우스가 아님을 확인하고, 다른 게스트하우스로 가자는 순간 멀다며 1불을 추가로 요구한다. 또 1불을 주고 내려보니 반경 몇 백 미터 안이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숙소라고 들어가 봤더니 론니 플래닛에 소개된 숙소 '화이트 하우스'에는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게다가 방들은 창문도 없이 어둡고 비좁은 데다 가격은 시설에 비해 비싸다.

이 귀곡 산장에 나 혼자 머물러야 된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난다. 방만 둘러보고 나오려고 하니 그조차 쉽지 않다. 가격이 문제라면 깎아 주겠다며 7불에서 6불, 5불까지 계속 내려간다.

"그게 아니라…저…사실은…다음에 다시 올게요."

차마 손님이 없어서 무서워 못 있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도망치듯 빠져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마더랜드 인 2'로 이동한다. 택시를 잡느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밤 늦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땐 정말이지 방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난 밤 내내 비가 내렸다. 아침에 눈을 뜰 때도 천막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아침은 "은서와 준서를 아느냐"는 숙소 여종업원들의 속사포 같은 질문으로 시작됐다. 이곳에 머물렀던 한국인 여행자의 이름인가 싶어 모른다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국인이면서 어떻게 은서와 준서를 모르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송혜교'와 '송승헌'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제서야 <가을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임을 깨닫는다. 작년 가을 미얀마에 최초로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가 소개됐는데 이 드라마가 미얀마 드라마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단다.

미얀마 전 국민이 '은서'와 '준서'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니 이게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다. 한참 <가을동화>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그 다음은 <올 어바웃 이브>를 아냐고 묻는다.

"이브의 모든 것?"

제목을 들어본 것도 같아 고개를 끄덕였더니 환성을 지르며 주인공들 이름을 줄줄이 댄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들이다. TV를 전혀 보지 않는 내가 하루가 다르게 떴다가 지는 그 무수한 반짝별들의 이름을 어찌 알까? 당연히 모르는 눈치를 보였더니 이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을 팔고 있는 아저씨. 자세히 보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장동건의 사진도 보인다.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을 팔고 있는 아저씨. 자세히 보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장동건의 사진도 보인다.김남희
중국, 라오스, 미얀마, 태국 할 것 없이 지금 아시아에서는 TV 드라마와 영화, 노래 등의 대중문화에 있어서 한국 바람이 확실하게 불고 있는 것 같다. 양군 시내의 세계 유명 배우들 사진을 파는 곳에는 빠짐없이 장동건의 사진이 몇 장씩 놓여 있다. 이런 드라마를 보며 그들이 한국에 관해 갖는 환상은 무엇일까?

"한국 여자들은 전부 예쁘고, 날씬하고, 피부도 하얗고, 너무 너무 세련됐어."

찬사를 늘어놓으며 나를 훑어보는 눈길에는 '근데 새까맣고, 쪼만하고, 통통한 이 여자는 뭐지?'하는 의구심이 가득 찼다.

게다가 내 모습은 낡고 헤져 펄럭거리는 칠부 바지에 땀과 때에 절어 색깔이 변한 티셔츠-이젠 빨아도 늘 이 모양이다-를 걸치고, 샴푸 및 각종 비용 절감을 위해 짧게 올려 깎은 남자 같은 헤어스타일에 두꺼운 안경을 걸쳤으니, 이들이 TV에서 보는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세련된 옷차림을 한 미인들과 얼마나 비교가 되겠는가?

심술 맞은 나는 이들의 환상에 잔혹하고 냉정한 일격을 가한다. "TV에 나오는 여자들만 예뻐"라고.

종업원들과 수다를 떨다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간다.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 식사는 미국식이다. 계란 두 개와 식빵과 버터, 잼, 작은 빵 한 조각, 바나나 두 송이, 오렌지 주스, 커피나 차.

거리에서 담배를 팔고 있는 미얀마 아가씨. 얼굴에는 타나카 나무의 즙으로 만든 천연 화장품을 발랐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예전에 그랬든 한 개비씩 '까치담배'도 판다.
거리에서 담배를 팔고 있는 미얀마 아가씨. 얼굴에는 타나카 나무의 즙으로 만든 천연 화장품을 발랐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예전에 그랬든 한 개비씩 '까치담배'도 판다.김남희
식당에서 만난 프랑스인 중년 부부는 14살, 9살, 7살, 4살인 아이 넷을 데리고 9개월째 아시아를 여행 중이란다. 학교는 휴학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이 직접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공부를 가르치며 다니기 때문에 나중에 돌아가도 진도를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네팔에서 샀다는 네팔 전통옷을 입고 머리엔 터번도 감았다. 아버지 역시 아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익혔다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부모보다 훨씬 훌륭하고, 14살, 9살인 언니들이 밑의 동생들을 돌보는 모습은 부모 못지 않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다양한 여행 경험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본다. 반드시 비행기 타고 나가는 외국일 필요는 없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만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못 살고 가난한 나라일수록 인심은 좋고, 보고 느낄 거리도 많다. 살고 있는 동네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먼 지방으로,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가까운 주변 나라들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는 가족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뒷모습만으로는 성별을 확인할 수 없다고? 미얀마의 여자들은 거의 전부가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당연히 짧은 머리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뒷모습만으로는 성별을 확인할 수 없다고? 미얀마의 여자들은 거의 전부가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당연히 짧은 머리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다.김남희
배부르게 먹고 보청 마켓으로 돈을 바꾸러 나서니 비가 그친다. 멀다고 택시 타고 가라는 걸 산책도 할 겸 걸어서 나선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거리에는 맨발로 탁발을 하는 스님들이 곳곳에 보인다. 거리의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롱지라 부르는 치마를 입고 있고, 여자들은 전부 얼굴에 노란 칠을 하고 걸어간다.

골목의 시장으로 들어서니 조그마한 좌판 위에 꽃과 과일과 음식을 차려놓고 팔고 있다. 산다는 일은 어디에서도 쉽지 않다. 중심가로 다가설수록 고층 건물들이 몇 채 보인다. 거리에는 인도 영화로 보이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이 늘어서고, "체인지 머니"를 속삭이며 남자들이 따라붙는다.

조금씩 이 도시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암시장에서 돈을 바꾸고 시장을 구경한 후 글로벌 식당에 들르니 그새 얼굴을 기억한 매니저 딴세가 반갑게 맞아준다.

글로벌 식당은 얼마 안 되는 한국인 배낭여행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만나는 장소이다. 지금은 방학이 아니라 그런지 단 한명의 한국인 여행자도 없다. 딴세와 정보 노트로부터 여행 정보를 얻고, 이들 도움으로 바간행 버스표를 예약한다.

숙소로 돌아와 바간에 대해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자니 내 노트북을 본 스웨덴 커플이 공항에서 아무 문제 없었냐고 묻는다. 자신들에게는 혹시 노트북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면서. 미얀마 정부가 질색하는 외국인 여행자의 직업이 사진가, 기자, 작가라더니 그래서 노트북 검사를 하는 건가? 아무튼 미얀마에 있는 동안은 카메라나 노트북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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