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3

등록 2003.12.09 09:10수정 2003.12.0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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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족은 천산 신시에서 갈려나가 10개의 소국을 이루어 파내류 국에서 송화강 유역까지 흩어져 있고, 그래서 중원 땅 교화 지도자들은 거의 동이족이며, 타민족들까지 그 경전을 배우고자 교화 지도자를 모셔간다고 했다.

"자, 이제 문답을 하겠다."
스승이 불쑥 주제를 바꾸었다. 그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스승을 주시했다. 그들이 여태 공부해온 것은 '천경(天經), 신고(神誥), 전계(佺戒-3대 원시 성서)'였고 오늘 문답은 어느 것에서 시작될지 몰라 슬며시 긴장이 찾아들기도 했다. 마침내 스승이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참전경부터 시작한다. 자, 응(應)과 중(重)은?"
"신인을 높이 모심은 나라의 주체이오, 전계를 소중히 여김은 다스림의 법칙입니다."
청년들이 함께 대답했다.
"왜 뒤를 잇지 않느냐?"
청년들은 얼른 뒷 대답을 이어나갔다.
"평화와 혼란, 그 모든 원인도 여기에 있음이오, 신선들의 영기로서 산천을 빚어내니…."

그때 문밖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인 선인 있으시오?"
스승이 문을 열었다. 궁 안에서 온 사령이었다.
"무슨 일이오?"
"에인 선인은 어서 궁 안으로 들라는 태왕님의 분부이시오."

스승이 청년에게 나가보라고 했다. 청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손님과 그 이상한 짐승을 궁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자세히 잘 알아본 뒤 궁으로 안내하는 것이 선인이 지켜야 할 도리였다. 한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궁정 앞으로 안내하고 말았다. 만약 정말로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어서 나가보지 않고 뭘 하느냐?"
스승이 재촉했다.
"예,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청년은 절을 하고 공부방을 나왔다. 사령은 그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은 신발을 꿰며 사령에게 말했다.
"의관을 정제하고 가야겠으니 먼저 가시오."
벌을 받을 때도 선인은 의관을 정제해야 하는 것이 이 나라 국법이었다.

2


"에인 대령하였사옵니다."
청년은 어전으로 들어서며 먼저 그렇게 아뢰고 절을 올렸다. 푸른색 비단 옷에 흰 띠를 둘러서인지 전혀 다른 사람인 듯 귀티가 흘렀고 얼굴 또한 막 깎은 밤처럼 희고 깨끗했다.

"고개를 들라."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길을 내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태왕과 좀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보였다. 아침에 강에서 만났던 그 손님이었다. 청년은 역시 짐작했던 대로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내려 깔고 문초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때 사나이는 자지러질 듯이 놀라고 있었다. 의관을 정제한 늠름한 청년이 들어오기에 마음까지 잔뜩 부풀었는데 그가 다름 아닌 그 망상가였다니…. 사나이는 참을 수 없어 태왕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서둘러 물었다.

"폐하, 저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이 청년이옵니까?"
"그렇소이다. 지금은 청년 선인이지만 내년엔 조의선인이 될 거요."
사나이는 아주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어 그저 시들하게 말했다.
"이 청년은 이미 아침에 만나보았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인연은 이미 시작되었구려."
"폐하께서는 저의 말씀을 곡해하셨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청년은…."

태왕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사나이는 멈칫 말을 끊었다. 태왕이 다시 물어보았다.
"계속하시오. 그래 바라는 청년은?"
"활도 잘 쏘고 칼도 잘 다루는… 그래야만…."
"그런 일이라면 안심을 하시오. 이 청년은 활쏘기에도 명수라오."

태왕이 미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나이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통 칼과 활을 다루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마음의 표적이 형성되고 그와 동시에 눈빛이 달라진다. 눈의 정기도, 야망과 포부도 그때 생겨난다. 탁월한 자는 이미 정기까지 넘쳐 상대를 쏘아볼 줄도 안다.

한데 이 청년은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맑기만 했다.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고 맑기만 하다는 것은 그 무엇도 취해본 바가 없는 갓난아이와도 같다는 뜻이다. 더욱이 도성에서 떨어진 강에 나가면서도 아이들처럼 활이나 단도도 지니지 않았다. 그런 청년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다 이 청년은 신용이나 기다리는 몽상가였다. 땅을 되찾거나 정복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왕은 청년의 자질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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