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권력의 집, 중국 고궁(1)

<중국의 세계문화유산1> 고궁(故宮)박물관

등록 2003.12.07 05:47수정 2003.12.0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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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광장에서 바라보는 톈안먼의 모습

광장에서 바라보는 톈안먼의 모습 ⓒ 김대오

톈안먼(천안문) 광장에 서서 고궁을 바라보면 마오저동(毛澤東)과 눈이 마주친다. 1976년 9월 9일 그가 죽은 날을 기념하여 그의 초상화 왼쪽에 중화인민대단결만세(中華人民大團結萬歲) 아홉 글자와 오른쪽에‘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團結萬歲)' 아홉 글자가 각각 적혀져 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저동은 지금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바로 위, 그 자리에 서서 역사적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반식민치하에 있던 중국인들은 건국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었다.

지하도를 이용해 넓은 도로를 건너면 톈안먼 앞에 금수하(金水河)가 흐르는데 그 위로 외금수교(外金水橋)라고 부르는 일곱 개의 하얀 대리석 다리가 있다. 가운데 왕만이 다니던 어로교(御路橋)가 5.78m로 가장 넓게 설계되어 있다. 또 그곳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위협적 의미의 창, 칼 등이 새겨져 일반인의 출입을 경계하고 있다.

a 톈안먼 앞에 있는 단아한 화표의 모습

톈안먼 앞에 있는 단아한 화표의 모습 ⓒ 김대오

외금수교 양쪽에는 화표(華表)라 부르는 500년 된 두 개의 큰 기둥이 서 있는데 그 위에는 황제가 밖에 나갔다가 산수(山水)의 멋에 빠져 돌아오지 않으면 어서 돌아와 국정을 처리하도록 권한다는 후(吼, 용의 아홉 아들 중의 하나)라는 전설의 동물 조각상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조각은 망군귀(望君歸)라고도 부르는데, 톈안먼 안쪽에 황제가 궁중에만 머물며 국정을 돌보지 않을 때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도록 권하는 역할을 하는 망군출(望君出)과 함께 쌍을 이루고 있다.

또한 양쪽에 한 쌍의 돌사자가 있는데 왼쪽에 놓여 있는 수놈은 오른발로 구슬을, 오른쪽의 암놈은 왼발로 아기사자를 데리고 놀고 있다. 왕의 권력이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바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황제만이 지나다녔다는 톈안먼의 가운데 문을 통해 들어가면 양 옆으로 문물전시관과 보위대의 훈련장면을 볼 수 있다. 단문(端門)을 지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의 정문이라는 오문(午門)이 나온다.


고궁에는 네 개의 출입구만이 있는데 정문인 남문 오문(午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원래는 현무문(玄武門)이었으나 강희제의 이름에 玄자가 있어 神으로 바꿈), 동문인 동화문(東華門), 서문인 서화문(西華門) 이다.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원리에 따라 오문은 주작을 상징하며 오봉루(五鳳樓)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a 고궁의 남문인 오문

고궁의 남문인 오문 ⓒ 김대오

오문은 황제의 명을 거슬린 역린(逆鱗)의 죄수들을 처형하거나 황제가 조서를 발표하던 곳이었다. 오문에 있는 다섯 개의 아치형 문도 봉건계급의 철저한 신분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중앙의 통로는 황제의 전용 문으로, 황제 외에는 혼례를 마치고 입궁하는 황후와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자만이 이 문으로 출궁할 수 있었다.

황제를 알현하고 나가는 문무 백관은 동문을, 황실의 종친은 서문을 이용하였다. 황제를 알현하고 조회에 참석한 문무 백관의 수가 많거나 황제의 전시를 치르기 위해 온 거인(擧人)의 수가 많을 때에는 좌우의 액문으로 들어가도록 했는데, 거인의 경우 석차에 따라 홀수는 동액문으로, 짝수는 서액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a 태화문 앞을 흐르는 내금수교 아래의 물

태화문 앞을 흐르는 내금수교 아래의 물 ⓒ 김대오

오문을 지나니 내금수교가 나오는데 옥허리띠 모양으로 굽어진 것이 2만6천㎡의 그 너른 태화문 앞마당과 멋지게 어울리는 그림이 된다. 그 너른 마당을 지키는 것은 또 청동으로 된 두 마리의 암수사자이다.

내금수교 다섯 개의 다리는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상징하며 그 아래의 물은 황실의 권력과 천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말라는 의미로 고궁 내에서만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내금수교의 가운데 어로교(御路橋)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하천을 파서 나온 흙을 쌓아서 고궁 뒤의 경산(景山)을 만들었다.

고궁은 다른 황궁의 기본구조인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리를 따라 황제가 정무를 보던 전외전과 휴식공간인 후내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외전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을 중심으로 동서로 문화전(文化殿)과 무영전(武英殿)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a 절대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주는 태화전의 모습

절대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주는 태화전의 모습 ⓒ 김대오

외전 중에서도 황제의 즉위식, 원단(元旦)같은 축제일의 제전(祭典), 조서 반포, 황태자의 탄생 축하, 황제의 생일 축하 등 중대한 국가행사를 거행하던 태화전은 이중처마에 높이가 35m, 면적이 2377㎡나 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면서 최고 통치자의 위엄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궁 최고의 건축군을 이루는 태화전은 ‘工’자 형태의 한백옥(漢白玉)의 3기단 위에 지어져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신선의 집처럼 느껴지게 설계되었다.

태화전이 올라앉은 3층 기단에는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1488개의 돌기둥이 둘러 서 있고 단 아래에는 1142개의 용머리 조각 배수구가 있는데, 비라도 올라치면 천여 마리나 되는 용의 입에서 일제히 물을 토해내는 광경이 장관이다. 또 의식이 있을 때마다 향을 피워 푸른 연기와 하얀 기단 위에 선 황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명을 받은 천자처럼 보여지도록 하였다.

a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태화전 앞의 동귀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태화전 앞의 동귀 ⓒ 김대오

태화전 앞의 동, 서 양쪽에 동학과 동귀가 한 쌍씩 있는데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있으며 태화전의 처마에도 선인주수(仙人走獸)라는 아홉 마리의 신령스럽고 길상의 동물들이 황제의 안녕과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있다.

맨 앞에 봉황을 탄 신선이 있으며 그 뒤로 용(龍), 봉황(鳳), 사자(獅子), 천마(天馬), 해마(海馬), 산예(?猊), 갑어(押魚), 해치, 소(斗牛)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종의 계급장 역할을 하여 많을수록 신분이 높다.

a 날아갈 듯한 처마 위에 길상의 선인주수

날아갈 듯한 처마 위에 길상의 선인주수 ⓒ 김대오

보통 3, 5, 7, 9개로 처마에 장식이 되는데 황제가 거하는 톈안먼, 단문, 건청궁 등에 9개가 있는데 태화전에는 특별히 행십(行什)이라는 길상을 더하여 신선을 제외하고도 모두 10개의 길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특이할 점은 고궁이 거의 목재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화재에 매우 취약하여 선인주수 중에는 불을 잡아먹는 전설 속의 동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궁은 주로 목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1407년 공사를 시작하여 1420년, 착공 13년 만에 완공하였다.

주로 석재를 이용하여 1420년 착공한 이탈리아의 플로렌스(Florence)성당은 11년이 지난 1431년에 단지 지붕만을 완성했으며 프랑스의 개선문은 30년이나 소요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건축 속도이다. 전체면적이 72만㎡이며 건축면적만 16만㎡인 것을 가만하면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a 금으로 도금된 방화수통

금으로 도금된 방화수통 ⓒ 김대오

그러나 목재건축물의 커다란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화재이다. 고궁은 완공 이후 400년 동안 24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 사건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고궁내에는 많은 방화수 역할을 하던 물항아리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겨울에 물이 얼 것을 대비하여 불을 지필 수 있게도 설계되어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항아리가 파라블라안테나처럼 생겨 번개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여 더 많은 화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태화전은 여러 차례의 소실, 재건이 반복되다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34년(1695년)에 재건된 것이다.

태화전 뒤로 황제가 큰 의식시에 휴식하던 중화전(中和殿)이 있다. 또 이곳에서는 천(天), 지(地), 일(日), 월(月)단에 제를 올리기 전에 황제가 제문을 읽고 종자와 농기구를 확인하던 곳이기도 하다.

외전의 마지막인 보화전(保和殿)은 최고의 시험인 전시(殿試)시험이 치러지던 곳이다. 보화전 뒤에는 대석조(大石雕)라는 길이 16.57m에 무게 250톤의 고궁내 최대의 석조 조각이 있다.

아홉 마리 용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평화로운 작품이지만 이 거대한 돌을 운반하기 위해 인부 수 천명이 겨울에 땅을 파고 물을 대서 얼음길을 만들고 하루에 2km씩 돌을 밀어 200km가 넘는 길을 운반해 왔을 것을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밖에 동서에 있는 문화전(文化殿)과 무영전(武英殿)은 황제의 서재 역할을 하던 곳이었으며 청대에는 이곳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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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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