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7

등록 2003.12.16 13:51수정 2003.12.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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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는 곳은 아주 멀리에 있소. 에인은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데, 만약 그를 따라간다면, 가는 도중이나 가서라도 어떤 모해는 입지 않겠소?"
"에인 선인의 괘는 우뚝해서 항상 남을 거느릴지언정 큰 해는 입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럼 작은 해는 입는다는 뜻이오?"

"누구든지 어떤 이해부족으로 작은 해는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인선인은 자기의 기로 그런 것까지도 다 씻어냅니다. 그래도 염려스러우시다면 우족점을 한번 쳐보심이 어떠실는지요."
"우족점?"


우족 점은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쳐보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도 국사 밖의 일은 아니라 싶어 태왕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럼 당장 준비해주시오."

역법사가 나간 뒤 태왕은 다시 생각을 굴렸다. 만약 우족 점까지 좋게 나오는데도 에인이 버틴다면? 그땐 정말 다른 사람을 물색해 봐야하나? 하지만 그런 대사에 왕족이 아닌 사람은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태자를? 그는 병법에는 능하지만 호신술에는 약하다. 우선 적지에 들어가자면 자기부터 무장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인물이라야 군사를 거느릴 수 있다….

그때 역법사가 돌아와 아뢰었다.
"뒤뜰에 준비되었사옵니다."
나가보니 언제 다 소집했는지 중신들과 교화 선생까지 당도해 있었다. 바닥도 이미 모래가 싹 쓸려 있었고 황소도 금 밖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태왕은 그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모두 대령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 태왕의 아우이자 재상이 에인의 출생과 괘를 쓴 붉은 비단 천을 들고 왔다.

"이리 가져오십시오."
역법사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고 재상이 비단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역법사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펴들고 황소의 뿔에 걸었다.
"이제 금 앞으로 데려가시오."

우사장이 황소를 금 앞에 대기시키자 왕은 황소의 오른쪽에, 역법사는 왼쪽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재상도 그렇게 태왕 옆에 서자 중신들은 역법사 옆으로 가서 똑바로 섰다.

중신들은 아직 오늘 이 행사의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표정들은 하나같이 경건했다. 어쨌든 그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고 자신들은 국가의 미래를 함께 지켜보는 중요한 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한점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섰을 때 마침내 태왕이 황소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걸어가라는 뜻이었다. 그 황소 역시 대소사 때 자주 불려나온 터라 엉덩이의 마찰을 신호로 알고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황소의 발자국으로 몰렸다. 황소는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똑 바로 걸었고 바닥을 딛고 간 발자국 역시 그러했다. 게다가 다른 때보다 그 간격이 좁았다. 그것은 빠른 시일 내 떠날 수 있고 그 길엔 그 어떤 방해요소도 없다는 뜻이었다.


우사장과 역법사가 발자국 간격을 재고 풀이를 할 때 태왕의 머릿속에 한줄기 바람 같은 것이 스쳐갔다. 아주 시원한 바람처럼 그렇게 온 생각이었다.
'10월 제천의례!'
그랬다. 그것은 보름 후로 다가온다. 그 제천의례에서 에인에게 신족의 예를 치르게 한다면 그것은 국중대회와 맞먹는 중요행사였고 에인 역시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늦어도 스무날 이후에는 보낼 수 있다!

"태대신들은 이리와 보시오!"
태왕은 즉시 중신들을 불러 모아 그 사실을 공표했다.
"이번 10월 소도 대제 때는 에인이 제주가 될 것이오."
그리고 태왕은 먼발치에 서 있는 교화선생을 불러 그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제천 전일까지 에인과 함께 지내시오. 그 사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조의선인으로 선발해주시오."
"에인은 벌써 조의선인의 자격을 갖추고 있사옵니다."
"그는 스승이 선발해줄 때까지는 그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오."
"알겠사옵니다."

태왕은 마지막으로 아우를 불렀다. 그리고 아우와 단둘이 어전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비로소 흉중의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에인이 멀리로 출정을 가야 한다네."
재상은 자기 아들을 왜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느냐고 묻지 않았다. 태왕의 결정은 국법이었고 에인 또한 자기 자식이기 이전에 이미 나라의 사람이었던 때문이었다. 태왕이 다시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대는 출정 비용에 쓸 물자를 점검하시게. 비단과 담비, 갈계피도 돈이 되겠지? 황담비(노란 담비의 모피)만 전부 내놓아도 꽤 여유로울 터이고…."
노란 담비의 모피는 특히 토호나 제후의 아내들이 선호해서 늘 금과 맞바꿔지곤 했던 터라 태왕은 그를 염두에 두고 한 소리였다.

"그러하겠습니다만 담비모피는 이미 지난번에 별읍장님께 보낸 터라 남은 게 몇 벌 없습니다."
"그러면 금은 얼마나 있는가?"
"순금이 약 스무 말쯤 될 것이옵니다."
"그럼 그중 스무 되를 내놓으시게."
"금을 스무 되 식이나요?"

에인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출정을 한다는 사람한테 금은 또 왜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가 확인 차 되물었다.
"군장비가 아닌 금을 말이옵니까?"
"그렇다네. 혈한마(血汗馬)도 몇 마리 구해야 하고…."
"혈한마를요? 그건 대원국에서나 나는 말이 아니옵니까?"

대원국(오늘날 소련 Turkestan 지역)이라면 만 여리도 더 떨어져 있는 머나 먼 곳이었다.
"그렇다네. 에인이 혈한마를 탄다면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을 것이 아닌가?"
그 말은 한번 몰면 천리를 달릴 뿐만 아니라 달릴 때 온 몸이 빨갛게 된다 해서
혈한마, 또는 천리마로 불리기도 했다. 이 명마는 꼬리가 없고 털이 짧은가 하면 다리가 길었다. 그럼에도 달릴 땐 다리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 동방은 물론 서방, 중원지방의 모든 장군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명마 중 명마였다.

"그러면 군사는 얼마나 딸려 보낼 생각이시옵니까?"
"정예군사 2천 명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선인들 열명만 따라가게 할 참이네."
무슨 소린가? 출정을 간다는 사람한테 군사도 없이 말만 태워 보낸다? 아우가 의아해 하자 태왕이 설명을 했다.

"군사는 적지와 가까운 곳, 그러니까 중원 너머 형제국에서 동원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형제국 군사를 말입니까?"
"그것이 쉽지 않겠는가. 또 우리에게는 서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다는 조약도 있고…."
"그건 압니다만…."

"생각해보게. 여기서부터 군사를 대동한다면 거리도 녹녹치 않을뿐더러 많은 군량까지 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또 듣기로는 삼위산(돈황)에서 파령(파미르고원)까지는 광활한 사막도 있다는데 어떻게 무사히 모두 이동하겠는가. 그런데다 날씨도 추워지고 있으니 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실만 더 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형제국도 여럿인데, 어느 나라를 일컫사옵니까?"
"그쪽에 파내류 국도 있고 비난(裨難), 양운 국도 있으니, 어디에서든 사정이 통하는 나라를 택해야겠지."
"그 '딛을 문' 이라는 곳은 영토가 크옵니까?"
"사방 다 합쳐서 백 여리 정도라더군."

"크지는 않군요. 그렇다면 군사는 형제국에서 동원하는 것이 물자절약 상 유리하겠습니다. 하다면 군장비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활이야 전 세계에서도 우리가 가장 뛰어나니 여기서부터 실어가야겠지?"
"그건 쉬지 않고 만들고 있으니 물량이 충분할 것이옵니다."
"그럼 칼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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