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떠남을 꿈꾼다

한강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등록 2003.12.11 11:14수정 2003.12.11 16:50
0
원고료로 응원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 해,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었는지. 나의 마음은 어디를 서성거리고 때로 헤매었는지."

우리는 언제나 떠남을 꿈꾼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떠남 대신에 여행을 통해 얻은 생각을 담은 책 한 권만으로도 여행을 다녀 온 듯한 느낌을 얻을 때가 있다. 한강의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작가 한강이 문학 연수 프로그램에 6개월 정도 참여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연수 프로그램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들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미국의 아이오와 주에서 보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소설가인 그녀가 경험하는 다른 세상의 모습들은 섬세하고 애정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백인 중류층 일색인 중서부의 아이오와에서 처음 만난 인디언 여자가 던지는 말들은 그녀의 마음을 파고든다.

"버스에 오르면 내 옆에 앉을 건가?" 그녀는 물었다.
"왜요?"
"네가 마음에 들어서. 인상 쓰고 정면만 바라보고 말 한마디 건네려 하지 않는 인간들은 질색이야. 인생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지."


작가는 이 여자에게 여행하는 동안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왼쪽 어깨에는 죽은 어머니가, 오른쪽 어깨에는 죽은 아버지가, 그리고 가슴에는 죽은 남편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대답한다. 죽은 이들도 그녀의 가슴 안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참여하는 문학 연수 프로그램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 함께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살아왔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똑같다. 그들의 열정과 사랑 속에서 세계의 문학은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나누는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은 작가로서의 그들의 마음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스페인에서 온 친구 파비앙이 말하는 짤막한 이야기는 글쓰기와 삶의 모습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중세 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 봉투에 성당과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작가는 이 대화 속에서 글쓰기나 삶이 그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성당의 모습이 어떤 것이 될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한 장 한 장 벽돌을 구워 쌓아 가는 과정.

이 기나긴 과정 속에 우리 인간은 작은 모래알처럼 존재한다. 그 모래알의 꿈틀거리는 에너지로 역사라는 커다란 성당이 완성된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에너지를 품고 있는 모래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이 너무나 소중하다.

팔레스타인에서 온 마흐무드는 늘 바쁘게 움직이는 친구이다. 그의 방랑벽을 보고 사람들은 '팔레스티니안의 불안함'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가파른 세월과 함께 방랑벽을 지니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 하지만 그는 삶의 열정을 지니고 있다.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작가가 경험한 다양한 삶의 모습, 그들과의 대화, 낯설기만 한 도시 풍경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이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새로운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베트남 친구 하이가 던진 "사람은 살다 보면 가끔씩 미치기도 하는 거야"라는 말처럼, 우리는 살다 보면 가끔 엉뚱한 일들을 꿈꾸곤 한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꿈, 며칠쯤 회사에 결근하고 집에서 실컷 늦잠 자는 꿈.

때때로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난 긴긴 여행을 꿈꾼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에 대한 갈망. 이 한 권의 책이 그 갈증을 해소할만한 새롭고 다른 세상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지금 속한 일상에서 꿈과 현실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열림원, 200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2. 2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