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따로 없었다카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21>공장일기(15)

등록 2003.12.11 12:43수정 2003.12.11 16:1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창원공단 하늘을 바라보며

창원공단 하늘을 바라보며 ⓒ 이종찬

"고마 됐심니더. 빈대도 낯짝이 있지, 우리 겉은 넘들이 우째 아지매가 주는 공술로 받아 묵겠심니꺼."


"내가 운제(언제) 한꺼번에 외상값을 다 갚으라 카더나. 그래도 월급을 탔다꼬 삐게이(병아리) 눈물 만큼 되는 그기라도 들고 오는 기 울매나 고맙노. 그것도 맴(마음)을 잘못 쓰모 그리 안되는 기라."

그랬다. 월급을 탄 그날, 우리들은 월급보다 더 많이 밀린 외상값에도 불구하고, 그 아지매가 따라주는 소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그 아지매에게 부탁을 했다. 앞으로는 월급날이 되어도 공장 앞에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그리고 월급날마다 우리가 알아서 쬐끔씩이라도 외상값을 갚겠다고.

월급날, 우리는 그렇게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바이트(쇠를 깎는 뾰쪽한 도구)처럼 악을 쓰며 노래를 불렀다. 몇 시간 뒤면 또다시 기름과 쇳가루에 범벅이 되어야 할 서로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이어지는 잔업과 철야근무에 몸서리를 치며.

날마다 솟구치는 눈물을 깎는다
물집 터지는 손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아픔을 깎는다
뽀드득 이 악물며
마침내 이 강산마저 이별해버릴
찬란한 선진세상을 깎는다
늘푸른 장복산을 가슴에 끼고
죽어라 쇠만 깎아온
기다림의 세월을 깎는다
폐수처리장 간판 아래
온종일 기름 무지개 띄우며
속으로 속으로 흐르는
저 남천내의 속앓이를 깎는다
기름 절은 바이트를 갈아 끼우며
이 세상 구석구석
제살처럼 박힌 슬픔을 갈아 끼우며
이 세상 모든 식민정책을 깎는다
화알활 타오르는 사랑의 힘
오로지 한 곳으로 모오두 끌어모아
저 빛나는 분파주의를 깎는다

(이소리 "제품을 깎으며" 모두)




"삐익~ 삑! 삑! 삐이이~"


"누가 이 야밤에 호각을 불어쌌노? 짜바리(경찰) 아이가."

"아니, 왜 하필이모 요기서 오줌을 누는교? 바로 옆에 통시(화장실)가 있는데."

"아, 생리적인 현상을 우짤끼요? 꾹 참고 통시까지 가다가 바지에 오줌을 싸는 거보다는 이기 훨씬 낫지."

나와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서씨도 그날은 억수로(엄청) 많이 취했다. 새벽 2시쯤 그 아지매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파출소 근처에서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란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실례(?)를 하다가 그만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결국 벌금 5천원을 물어야 했다.

"에이! 이 넘의 세상! 더럽고 치사해서 못 살 것네. 차리리 그때 고마 그 구멍가게로 지키고 있었으모 적어도 이런 일은 안 당할 꺼 아이가."

"그래도 얼라(아이) 코 묻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거보다는 공장에 댕기는 기 훨씬 더 낳지 않은교?"

"돈벌이야 구멍가게보다는 공장이 훨씬 낳지. 그런데 이기 오데 사람 사는 기가. 기계 부속품이지."

그랬다. 의령이 고향이었던 서씨는 5년 전에 내가 다니는 공장에 입사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대략 3년 더 일찍 입사를 한 셈이었다. 서씨 또한 나처럼 공장에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큰 꿈을 가지고 살았다고 했다. 계속되는 잔업과 철야가 오히려 신이 날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었단다.

"첫 월급을 탈 때까지만 해도 꿈에 부풀어 가 있었다 아이가. 그날 밤은 마누라캉 내캉 하룻밤에 집을 몇 채씩 지었다 허물었다 했다카이. 그라고 그때부터 월급날마다 저축을 꼬박꼬박하고 부모님께 돈까지 조금씩 보내줏다 아이가. 그때만 해도 한 십 년만 눈 딱 감고 참으모 집도 한 채 마련할 수 있을 거 같았다카이."

그러나 그것은 짧은 순간이었다. 내가 입사한 이듬해, 그러니까 1979년부터 창원공단도 불황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늘상 정상근무처럼 해왔던 잔업과 철야가 사라졌다. 그리고 급기야 나를 비롯한 공장 노동자들은 쇠를 깎아야 하는 시간에 계열사 제품을 팔러 다녀야 했다.

게다가 정해진 날에 나오던 월급도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기적으로 붓던 적금을 해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창원이 고향이어서 그나마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던 서씨는 당장 생활비마저 끊길 수밖에 없었다.

"쌀은 떨어졌제, 집주인은 매일 같이 찾아와서 당장 방 빼라고 야단을 피우제. 그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카이."

"하긴 저도 그때부터 애매하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아입니꺼. 그래가꼬 할 수 없이 가불을 자꾸 해서 쓰다 본께네 우짜다가 월급을 받아도 받을 끼 있어야지예."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불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물가는 계속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덩달아 창원공단 주변의 셋방비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급료는 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를 수가 없었다. 사실 외상값도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빚이었다.

견디겠어요
월말만 가까워오면
연탄 떨어져
쌀 떨어져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서
옹골차게 견디겠어요
사흘이 멀다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는
아내와 오랜만에 나란히
반지하 삭월셋(사글세)방을 나서면
왠지 어색하고 부끄럽다
백화점 쇼핑은 아니지만
부림시장에 쭉쭉 걸린 옷가지 둘러보며
입을 만한 겨울 옷 한벌 없이 쩔쩔매는
아내의 파카와 청바지를 고르는 데
아내는 새해 달력의 패션모델처럼
거울 앞에서 환하게 미소짓고
나는 몇 푼이라도 더 깎으려
생트집으로 실랑이 하다보면
슬며시 분통이 난다.

(이소리 "월말" 모두)


당시 나는 아침 7시 30분에 공장에 출근을 했다. 그러나 공장에 들어가더라도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모두들 공장 곁 빈 터에 나가 풀을 뽑고 이랑을 세워 무, 배추, 상치, 풋고추 따위의 채소를 심었다. 공장에서는 그곳에도 각 부서별로 팻말을 세워 무언의 경쟁을 하게 했다.

a 기름에 범벅이 된 현장노동자들에게 야유회는 자연을 벗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기름에 범벅이 된 현장노동자들에게 야유회는 자연을 벗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 이종찬

그때부터 우리는 정각 6시가 되면 퇴근을 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잔업만 한다 손치더라도 열 시가 넘어야 퇴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매일 같이 6시 정각에 퇴근을 하다보니 웬일인지 실업자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러다가 자칫하면 쫓겨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도 들었다.

"하모. 니는 병역특례를 받고 있은께네 잘리지는 않을 끼다. 하지만 우리는 요새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설마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째 자를 낍니꺼. 공장 일이 없는 기 오데 우리 땜에 그리 된 깁니꺼. 높은 넘들이 다 잘못해가꼬 그리 된 기지."

그랬다. 그때부터 서씨는 한숨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포장마차에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서씨가 먼저 내게 술 한 잔 하러 가자고 잡아끌기가 일쑤였다. 평소의 서씨는 퇴근 무렵 소주 한 잔은커녕 부서원간의 야유회다, 회식이다 하는 모임에도 나이 핑계로 일절 참석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요새 와 그랍니꺼? 그렇찮아도 월급조차도 잘 나오지 않는데."

"월급을 타모 뭐하노? 그동안 내가 꼼쟁이(구두쇠) 소리로 들어감시로(들어가면서) 그렇게 꼼꼼하게 살았어도 남은 기 뭐가 있노. 빚밖에 더 있나."

1980년 당시 나는 기본급 10만원에 자질구레한 수당을 포함하여 12만원 정도를 받았다. 게다가 잔업과 철야근무를 번갈아 가면서 해도 겨우 17만 원 남짓했다. 서씨도 나와 비슷하게 받았다. 서씨는 나보다 3년 남짓 더 일찍 입사를 했지만 기능사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오죽했으모 마누라까지 공장에 내보냈것나. 그래도 요즈음은 마누라 땜에 겨우 입에 풀칠로 하고 산다카이."

그래. 나는 지금도 창원공단 옆 포장마차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포옥 내쉬던 서씨의 옆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포장마차로 찾아온 서씨의 아내가 서씨의 호주머니에 꼬깃꼬깃한 만원 짜리 한 장을 찔러준 뒤 눈물을 글썽이며 쓸쓸히 돌아서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 배 고풉니더. 그거만 마시고 퍼뜩 오이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