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스터 베테랑', 마르크스를 좇다

[현지보고] 런던에서 찾은 마르크스의 발자취

등록 2003.12.12 10:25수정 2005.06.1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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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주시오, 나의 이 모든 노래들을
당신 발 밑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내 마음의 노래들을


그 곳, 수금이 높여 부르는 가락 속에서
내 영혼 빛 속으로 날개를 펴고 나아가니

아, 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가 그대에게 전해져
달콤한 속삭임으로 그대의 갈망을 휘젓고

당신의 맥박을 열정 속에 뛰게 하여
그대의 굳은 마음에 미동이라도 일게 하였으면…



누구의 시일까? 하인리히 하이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시)? 믿기 어렵겠지만, 이 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것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마르크스와 엥겔스 부부. 오른쪽이 마르크스와 그의 아내 예니.
절친한 친구였던 마르크스와 엥겔스 부부. 오른쪽이 마르크스와 그의 아내 예니.강인규
고집불통으로 보이는 그 털보 영감이 연인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이 아름다운 시를 썼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1836년 11월, 그러니까 그가 18살 되던 해, 사랑에 빠졌던 예니(Jenny von Westpalen)에게 이 소네트를 바쳤다.


일평생 책벌레로 알려졌던 마르크스에게는 또 다른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베를린의 프리드리히-빌헬름스 대학(Friedrich-Wilhelms-Universitat; 현재의 훔볼트 대학)으로 옮겨오기 전, 마르크스는 당시 "파티학교"로 알려진 본대학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거나 여자를 놓고 친구들과 주먹다짐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곤 했다.

부유한 가문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난 철부지 소년. 그는 이후 자신의 삶을 소외와 착취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뒤로한 채 타국의 도시 런던에 잠들어 있다. 그가 십대에 소네트를 바쳤던 아내 예니와 함께.


런던을 다시 찾은 것은 칠 년 만이다. 변함없이 뿌옇게 흐린 대기, 낡았지만 우아한 타운하우스, 그리고 붉은 이층버스는 그 동안의 세월을 건너 뛰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지독하게 비싼 물가도 변하지 않았다.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국인들이 전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는 것과, 거리의 외국식당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음식에 관한 한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영국이지만,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은 영국인들의 식탁과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었다.

흔히 런던은 유럽여행이 시작되고 끝나는 도시이기에 너무나 친숙하지만, 찬찬히 둘러보지 않고 서둘러 떠나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비싼 물가에 쫓겨 허겁지겁 타워브리지 앞에서 사진 찍고, 대영박물관을 한 바퀴 돌아 본 후, 다음 날 버킹엄궁전의 근위병 교대식(Change of The Guard)을 지켜보고 나서 소시지와 계란으로 된 영국식 아침을 먹고는 서둘러 길을 떠나기 마련이다.

칠 년간의 세월은 도시보다는 방문자를 더 많이 바꾸어 놓았다. 청바지와 배낭 하나로 호기롭게 히드로 공항에 내렸던 청년은 사라지고, 학회일정에 맞춘 어색한 복장에 서류가방을 든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피카딜리 서커스의 에로스상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할 일 없이 소호의 식당가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철부지가, 격에 어울리지 않게 버지니아 울프나 찰스 디킨스의 자취를 좇아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마르크스의 초상
마르크스의 초상강인규
불과 얼마 전까지 세계의 삼 분의 일이 마르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둔 정치체제에서 살았고, 나머지 세계 역시 사회복지나 연금, 유급휴가 등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회제도와 더불어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불우한 현대사는 그 걸출한 사상가의 삶과 철학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기회와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해충'이나 '전염병'과 같은 차원에서 '예방'하거나 '퇴치'하는 이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고, 상황은 현재까지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사회적인 차원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어린 시절, 공부나 운동 어디에도 신통치 못했던 내가 상장이라는 걸 만져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 그게 내가 실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붉은 별과 둥근 탄창이 그려진 기관총, 그리고 주둥이가 튀어나온 늑대를 익숙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뒤면 그 포스터는 금박이 찍힌 상장과 서른 여섯 가지 색상이 들어있는 근사한 물감 한 통으로 바뀌어 있곤 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마르크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이 포스터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국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마저 반쪽이 된 채 살아왔고, 그로 인해 시작된 전쟁의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피해자의 담론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니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불행하다. 이론적 분석이 경험적 상처를 통해 수용되고, 학술적 접근이 감정적인 이념의 잣대를 통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얻은 마르크스에 대한 지식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흔히 그렇듯이 말이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세상이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졌다고 믿었다거나, 인간이 전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마르크스라는 이름에서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역사적 유물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 역시 마르크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르크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예술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가족>에서는 역사가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역사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역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오히려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취한 행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는 그의 생존 당시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오!"

비록 자신의 사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마르크스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체제전복세력"으로 추방당했고, 심지어 모국에서조차 "국적불명자"라는 이유로 쫓겨났던 그는 전 세계를 국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르네상스적 의미의 전인적 교양을 갖춘 마지막 지식인이었던 마르크스는 동시에 최초의 세계시민이었던 셈이다.

뮤지엄 태번(Museum Tavern).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하다가 저녁이면 이곳에서 맥주로 피로를 풀곤했다.
뮤지엄 태번(Museum Tavern).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하다가 저녁이면 이곳에서 맥주로 피로를 풀곤했다.강인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마르크스의 묘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겨울이 우기인 이곳 런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대영박물관 앞을 지나 그가 매일 저녁 지친 머리를 맥주로 식히던 선술집 쪽으로 걸어간다. 150년 전, 마르크스가 걸었던 길이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 발표된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실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평생동안의 우정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부유한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둘 모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라인지방의 유능한 변호사였고, 엥겔스의 아버지는 독일과 영국에서 큰 방직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모젤지방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나는 포도주에 취하기보다는 포도재배 농민의 궁핍함에 눈을 돌렸고, 엥겔스는 아버지의 사업이 가져다주는 부와 안락함에 기대기보다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뇌에 관심을 쏟았다. 마르크스는 돈벌이에 별 재주가 없었고, 엥겔스는 이런 마르크스에게 말년까지 생활비를 보낸다.

<자본론>을 집필하던 당시, 마르크스 가족의 궁핍은 극에 달했다. 마르크스는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못으로 박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다" 전당포에 팔아야 했다. 그는 "자본"에 대해서 연구하는 자신이 자본을 관리하는 재주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부모가 남긴 약간의 유산이 도착해서 생활이 좀 나아지자, 마르크스는 악성 피부괴질로 고생해야만 했다. 그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나마 프롤레타리아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어야 하지 않겠나."

마르크스의 묘지가 있는 하이게이트 언덕. 앞에 "맥도널드로(路)"라고 쓰인 푯말이 보인다.
마르크스의 묘지가 있는 하이게이트 언덕. 앞에 "맥도널드로(路)"라고 쓰인 푯말이 보인다.강인규
아치웨이(Archway) 역에서 내려 하이게이트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오르던 이 언덕의 입구에는 이제 맥도널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하이게이트가(街)를 가로지르는 첫번째 길에는 "맥도널드로(McDonald Road)"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하이게이트 묘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길도 묻고 지친 다리도 쉴 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작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 젊은 청년이 방금 들여온 꽃단을 풀어 가게 앞에 보기 좋게 진열하고 있었다. 굵은 꽃대 끝에서 물을 한껏 머금은 장미송이들이 싱그러웠다.

나는 긴 줄기의 장미 한 송이를 집어들고는 청년에게 묘지의 위치를 묻는다. 그는 "마르크스 묘지에 오셨군요"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역시 반공포스터의 베테랑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청년은 익숙한 솜씨로 장미를 다듬어 포장하고는 앞치마에 손을 쓱 닦고 거스름돈을 내어준다. 내가 묘지를 지나쳐 왔다는 것이다.

하이게이트 동묘의 비석들
하이게이트 동묘의 비석들강인규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건물 사이로 난 작은 공원길로 들어선다. 흰 구름 사이로 드러난 푸른 하늘은 이미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워털로공원(Waterlow Park) 끝자락에 위치한 하이게이트 묘지는 동묘와 서묘 둘로 나뉘어있다. 서묘는 규모도 크고 잘 가꾸어져 있는 반면, 동묘는 작고 초라하다. 동쪽에 묻힌 마르크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었다.

묘지 앞에 도착했을 때, 동묘와는 달리 안내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서묘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묘지에 들어서자, 비바람에 닳고 세월에 이끼 내린 비석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곳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의 절망과, 부모를 묻고 돌아선 자식들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

동쪽 끝에 묻혀있는 마르크스의 묘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장 많은 꽃이 놓인 묘 하나가 멀리서 주인의 존재를 웅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오는 새벽에 놓인 이 많은 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마르크스 묘지에 오셨군요"라고 말하던 그 영국 청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묘
마르크스의 묘강인규
나는 장미를 놓고 잠시 묵념을 한 후 돌아섰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열 한 번째 글귀가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바꾸느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동상 위로 가을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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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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