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초상강인규
불과 얼마 전까지 세계의 삼 분의 일이 마르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둔 정치체제에서 살았고, 나머지 세계 역시 사회복지나 연금, 유급휴가 등 어떤 형태로든 그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회제도와 더불어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불우한 현대사는 그 걸출한 사상가의 삶과 철학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기회와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해충'이나 '전염병'과 같은 차원에서 '예방'하거나 '퇴치'하는 이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고, 상황은 현재까지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사회적인 차원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어린 시절, 공부나 운동 어디에도 신통치 못했던 내가 상장이라는 걸 만져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 그게 내가 실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붉은 별과 둥근 탄창이 그려진 기관총, 그리고 주둥이가 튀어나온 늑대를 익숙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뒤면 그 포스터는 금박이 찍힌 상장과 서른 여섯 가지 색상이 들어있는 근사한 물감 한 통으로 바뀌어 있곤 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마르크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이 포스터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국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마저 반쪽이 된 채 살아왔고, 그로 인해 시작된 전쟁의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피해자의 담론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니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불행하다. 이론적 분석이 경험적 상처를 통해 수용되고, 학술적 접근이 감정적인 이념의 잣대를 통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얻은 마르크스에 대한 지식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흔히 그렇듯이 말이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세상이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졌다고 믿었다거나, 인간이 전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마르크스라는 이름에서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역사적 유물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 역시 마르크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르크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예술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가족>에서는 역사가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역사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역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오히려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취한 행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는 그의 생존 당시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오!"
비록 자신의 사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마르크스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체제전복세력"으로 추방당했고, 심지어 모국에서조차 "국적불명자"라는 이유로 쫓겨났던 그는 전 세계를 국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르네상스적 의미의 전인적 교양을 갖춘 마지막 지식인이었던 마르크스는 동시에 최초의 세계시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