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이, 모르겠다' 1박2일 나홀로 소백산 주유기

등록 2003.12.16 19:50수정 2003.12.2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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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도착한 영주, 빗속에서 즐긴 '달리기 대회'


몇 달 전 이 곳 부산에서 꽤나 먼 영주에서의 달리기대회 안내를 보고서 독서실 쉬는 날도 아니고 어쩔까 망설이다 낯선 곳에서 달려도 보고 한번 가고 싶었던 소백산구경도 하고, '그래, 혼자서 한 번 떠나보는거야' 마음먹고 덜컥 신청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대회날인 9월 7일.(정확히는 오늘 아침), 철희씨에게 독서실 마무리를 맡기고 새벽 1시10분 빗길에 출발한다. 가자, '영주 소백산 달리기대회'로.

낮에 밤길주행을 위해 조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산 지나면서부터.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고 칠서휴게소에서 조금 눈을 붙여보려 애쓴다.
그런대로 대구의 금호분기점 지나 군위휴게소까지 가서 쉬어갈까 하다가 내쳐 달린 것이 화근.

조금 지나니 눈 앞이 가물가물, 지난 여름휴가때 거제에서 부산 올 때의 힘들었던 밤길이 떠오르고 가도가도 휴게소 안내판은 보이질 않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갓길에 차를 세워두는데 비는 출출 내리고 차들은 옆으로 씽씽 달리고 '에라이 모르겠다' 시트를 젖히고 비몽사몽하는데 어디선가 창문 두드리는 소리.

한 번 떠올려 보시라. 비내리는 야밤의 고속도로 갓길에서 불안한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 차창을 두드릴 때의 섬뜩한 느낌. 잠이 번쩍 깨면서 일어나니 고속도로 순찰차다. 갓길에 위험하니 어서 출발하란다.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출발, 한 5km쯤 가니 안동휴게소 안내판이 보인다. 5km를 못참고 벌어진 헤프닝, 잘한 건지 어떤 건지. 어쨌든 안동을 지나 영주에 닿으니 아침 7시, 6시간 가까이걸린 셈이다. 미리 달리기코스를 돌아보고 밥먹을 데를 찾는데 역전 앞에 설렁탕집, 맛이 괜찮다. 근처 목욕탕에서 씻고 잠시 눈을 붙이려 하는데 잠이 잘 오질 않는다. 마음 턱놓고 조금 자두면 좋으련만 그게 안된다.

9시 20분쯤 대회장인 영주운동장에 도착. 잔머리 굴려 근처 주유소 옆 빈터에 주차시키고(약간의 참가경험에 따르면 지정주차장은 거리가 멀고 복잡하다) 운동장으로 들어간다. 파란 잔디, 비는 계속 내리고 형형색색의 러닝복 차림에 다들 밝고 환한 표정, 비를 크게 의식하는 이는 없어 보인다.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준비운동도 하고 트랙을 따라 가볍게 뛰어도 보면서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줄곧 불안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기를 즐기리라 마음먹는다. '가볍게 가볍게' 10시 정각, 출발신호와 함께 참가자들은 환호를 지르며 일제히 출발선을 나선다. 가장 신나고 흥분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리는 빗속을 천천히 달리며 달리기 풍경을 즐겨본다.

무표정한 진행요원들이 서있고 선두는 저만치 보이지도 않은 채 긴 꼬리를 이루고 뒤쪽에서 컨디션을 조절하며 달리기 폼이 그럴듯한 젊은 여자를 겨냥하여 뒤를 따른다.(나보다 조금 잘 뛸 것같은 사람을 정하여 뒤따라 가면서 페이스를 유지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다. 왜 젊은 여자냐구요, 신통한 질문은 아니네요. 지난 번 삼천포대회 때 여자 잘못 만나서 오버 페이스 하는 바람에 시껍했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군데군데 마을 농악대들의 서투른 농악소리가 그대로 흥겹고 지나는 행인들의 응원에 일일이 맞장구를 치면서 가능한 달리기를 즐기려한다.


10km 랲타임이 1시간, 최악의 기록이다. 젊은 여자는 숨소리가 가쁘고 옆에서 페이스를 맞추다 반환점 못미쳐 앞으로 나선다. 돌아오는 길, 다시 안정리 활주도로로 나서니 앞선 이는 저만치 앞에 가고 뒷사람도 제법 뒤처져 거의 혼자 뛰는 기분이다. 비행기의 비상활주로로 쓰이는 운동장같은 도로를 잠시잠시 눈을 감아보기도 하면서 혼자서 달리는 기분을 내본다.

남은 거리 5km, 다리가 무겁고 허리가 뻐근하다. 속으로 호흡을 의식하며 페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3km가 남고 2km가 남고 이제부터는 그냥 달린다.

골인점에 도착,(이 때 힘든 티를 내면 안된다. 사진이 나오기 때문에) 2시간 9분대. 그동안 일곱 여덟차례의 출전기록 중 가장 나쁜데도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메달과 빵, 음료를 받아들고 선 채로 먹는다.

이번 대회에 특이한 건 트랙 한 쪽에 노상 샤워시설을 해놓은 점이다. 그냥 러닝셔츠 차림으로 물세례를 받는다. 고맙고 기분이 너무 좋다. 샤워를 하면서 정리운동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면서 안정을 취한다. 주최측에서는 사과도 나눠주고 국수에 돼지불고기까지 푸짐하다. 이런데서 얻어먹는 음식은 별미다. 줄을 서서 불고기를 얻어먹고(국수줄은 너무 길다) 운동장을 나선다.

차에 돌아오니 부재중전화가 몇 통이나 들어와 있다. 집 밖에서 새삼 느껴지는 '가족', 무슨 개선장군처럼 전화를 넣는다. 아내의 목소리, 반갑고 정겨운. 주유소 창고에서 옷을 갈아입고 차를 빼서 나오다가 뒷걸음질로 도로 주유소로 들어간다. 고마움의 표시로 기름을 넣고 '풍기온천'으로 간다. 창문을 열고 한적한 국도를 달리며 오랜만에 차안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맛있다.

'죽령 옛길'과 민박집의 맞춤한 인연

'풍기온천', 휴일에 달리기 손님까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몇 번 탕 속에 들락거린다. 물이 매끄럽다. 아내가 왔으면 좋아했겠지. 밖으로 나오니 비는 계속 내리고 기분이 상쾌하다.

오후 3시쯤 이제 다음 일정을 정해야 한다. 산행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 부석사를 갈까 희방사 폭포까지 갖다올까 하다가 일단 차머리를 가까운 희방사 쪽으로 향한다. 먼저 잘데를 정하고 죽령옛길을 한 번 걸어보자. 1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갔다 왔다 2-3시간이면 될 듯.

느긋하게 시골길을 즐기며 소백산 쪽으로 올라가는데 오른쪽으로 사과를 파는 노점을 지나친다. 그냥 갈까 하다가 차를 돌려 아이들 줄 사과를 사기로 한다. 차를 돌려서 다시 유턴을 하는데 앞에 본 가게 밑에 또 다른 노점이 보이고 할머니(아니면 아줌마)가 손짓을 한다.

차를 할머니 가게 옆에 세우고 나서니 비를 가리는 차양 밑으로 사과를 박스째로 내놓으며 사과맛부터 보란다. 생각보다 싱거운 맛에 만원어치만 산다. 달가와 하는 기색은 아닌데 안쪽 허름한 창고같은데서 아저씨가 나온다.

주위에 잘 데를 찾으니 희방사 근처는 좀 비싸다며 머뭇거리다 자기집에서 자도 괜찮겠냐고 한다. 선뜻 그러마 대답하고 죽령옛길을 물으니 반색을 하며 마침 자기 동네라 한다. 같이 차를 타고 예쁘게 들어앉은 시골동네의 민박집을 알아놓고 차를 희방사역 앞에 주차시킨다.

a 죽령옛길 초입의 장승. 찻길이 생기고 거의 잊혀진 길인데 시에서 새로 가꾸었다.

죽령옛길 초입의 장승. 찻길이 생기고 거의 잊혀진 길인데 시에서 새로 가꾸었다. ⓒ 이성홍

여기가 죽령옛길 진입로다. 아마 혼자 찾고 다녔으면 헤맬 뻔했다. 민박집과 맞춤한 인연이다. 간단하게 러닝용 배낭을 메고 채비를 차린다. 역이 이름처럼 아담하고 이쁘다, 철길도 정겹고.

다시 돌아와 새로 장만한 디지털 카메라를 챙겨 들고 옛길을 오른다. 신라시대때부터 사람들이 오르내렸다는 길이다. 경북 아래지역 선비들이 과거보러 넘었다는 길,(이 길이 아니면 문경새재 쪽을 이용했다 한다) 길은 그냥 밋밋한 산길이다. 가면서 오히려 역 옆으로 산중턱에 걸쳐있는 중앙고속도로의 고가 다리가 더 인상적이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탱하는 다리의 다리가 한참 높다.(뒤에 들으니 높이가 70여m이고 죽령터널을 지나면 103m 짜리가 제일 높단다)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자꾸 사진찍으려 두리번거리게 된다. 꽃도 찍고 다리도 찍고 나무도 찍고 숲도 찍고 그러다가 찍기를 그만두었다.

그냥 숲길을 느껴보자. 아무렇게나 놓여진 돌, 풀, 꽃, 나무 그리고 사람들 이게 어우러져 난 숲길, 그 자체를 느껴봄직 하지 않은가. 군데군데 화랑이나 선비와 관련한 안내문이 서있는데 어찌 선비나 높은 이들만 다녔으랴.

천년 어쩌면 2천년도 더 전부터 다리품을 팔아 이 재를 넘었을 사람들. 이고지고 행상을 다녔을 장사꾼들, 재넘어 단양장에 소팔러 나들이했을 농꾼들, 그리고 이들을 노리고 나선 좀도둑들. 이들은 숲 속 주막에 쉬면서 무슨 말을 나누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쁜 꽃을 찍고 기암괴석에 탄성을 지르고 높은 이의 행적을 기웃거리는 일, 어찌 보면 이쁘고 잘빠진 여자나 잘 나가는 연예인을 밝히는 속물근성과 다를 바 무어 있겠는가. 속물이 같은 속물을 돌보고 챙기지 않음이 속물의 비애인지도.

비가 와서 숲길은 축축하고 질척거린다. 돌아내려갈 엄두가 안난다. 조금씩 뻐근해지는 허리를 느끼며 죽령재에 오르니 한 건 해낸 기분이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 청풍명월이 충청도고 선비의 고장이 영주란다. 그래 오늘은 다 좋다.

안내지에 소개된 죽령주막을 찾는데 입구부터 뽕짝 가락이다. 맛있는 저녁을 기대하기는 어렵겠다.(언제나 맛집은 여행의 첫번째 낙이다) 거의 술집에 가까운 '죽령주막'을 나와서 지나는 차를 얻어타고 희방사역으로 내려왔다. 구불구불 참 길다. 걸어내려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

내 차에 앉으니 편하다. 낮에 풍기에서 들어오면서 봐둔 삼계탕집에 가기로 하고 없는 눈썰미에 조심조심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풍기 인삼이 유명하니 삼계탕도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 부산가면서 가보려고 했던 그 집이다.(그러고 보니 안내지에 삼계탕 자랑은 왜 없는지 이상하네)

잔디 깔린 정원에 식당으로 쓰는 집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은 나 혼자다. 국물맛이 향긋하고 시원하다. 국물까지 싹 비우는 동안 목소리 큰 주인아줌마는 마실온 이웃과 계속 떠든다. TV까지 크게 틀어놓고.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요즈음 참는 경우가 훨씬 많다)

혼자 손님이라고 주인 아줌마가 직접 타주는 셀프용 커피를 받아들고 (참기를 잘했다) 정원 바위에 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문다. 털복숭이 강아지가 알짱거리며 다가와 종아리를 핥는다. 배부르게 잘먹고 잘 데도 정해놓았으니 걱정없는 저녁풍경이다.

혼자만의 민박, 이 편안함 이 평정함

민박집 마을로 돌아온다. 수철리, 마을이 참 예쁘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고 예뻐할 것. 정작 그 속의 살림살이야 내 몫이 아닌 바 쓸데없는 마음씀씀이는 이제 그만.

억지로 차 한 대 지나는 마을길을 돌아 민박집에 들어가니 아저씨가 반갑게 맞는다. 조촐한 아랫채에 불까지 넣어 아늑해 보인다. 모기걱정을 하니 혹시 모른다고 모기약을 뿌려주고 저녁을 권하던 아저씨는 안으로 식사하러 들어가고 나는 수돗가에서 빨래거리를 물에 흔들어 빨래대에 널어 놓는다.

강행군한 하루였는데 별로 피곤한지 모르겠다. (얼마전에 시작한 국선도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 긴장하고 있는건가) 이제 죽령 재아래 산골마을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간간이 마을어귀 철길로 리드미칼한 기차소리가 자장가처럼 정겹다.(기찻길옆 아기가 잘도 자는 이유를 알겠다)

집앞에 높다랗게 서있는 가로등 불빛이 달빛인양 한가로이 마당을 비추고 처마밑 평상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주인집에서 내준 사과를 깎아 먹으며 나는 혼자만의 여행의 묘미를 맛본다. 이 편안함.

a 민박집에 널린 도시의 빨래들, 복이다.

민박집에 널린 도시의 빨래들, 복이다. ⓒ 이성홍

저녁을 마친 주인아저씨가 평상에 나와 앉고 자연스레 객담을 즐긴다. 오랜만이다. 스스로를 숙맥처럼 살아왔다며 술, 담배도 안하고 일에만 파묻혀 지내왔다는 아저씨의 나이가 내년이면 칠순이란다.
아직 웬만한 젊은이보다 근력도 있고 일도 많이 한다며 한 오 년 정도 열심히 일하고 은퇴할거란다.(은퇴, 그래 은퇴는 이럴 때 쓰는 말이야) 마을 건너 산중턱의 고속도로 공사에도 마치는 날까지 7년간이나 일하면서 농사일에 이장일까지 겸하였단다.(이장집 나락은 다른 집 꺼보다 실해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말도 하였다)

평생 정직한 땀으로 일군 대가만을 원하였다며 나지막한 경어투의 듣기 좋은 북부 경상도 억양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올곧은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참 야무지고 얄미운 아저씨다.(도저히 할아버지를 느낄 수 없다) 처음 마을을 봤을 때의 느낌, 그 속에서의 삶을 나름대로 재단했던 일.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인가.

아저씨가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아까부터 평상 주위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서성거리는데 옆집 새끼라며 먹을걸 줘버릇해서 저러노라고 하며 요즈음 고양이들이 쥐를 안잡는다고 한다.

옆집 어미고양이가 마침 아저씨네 창고에서 새끼를 낳았는데 한날은 보니까 큰 쥐 한 마리가 새끼들 근처에서 놀고 있고 어미 고양이는 본체 만체 아예 새끼처럼 데리고 살더란다. 사진을 찍어 놨으면 볼만했을 거라며 허허 웃는다.

먹을게 족하면 본성도 변하는가. 본성(本性), 본디 성품이라는게 정해져 있긴 한걸까. 굳이 본성이라면 먹고 자고 번식하는 일 그 자체, 이에 따라 제각기 성품이 정해진다면 그 조건이 바뀜에 따라 성품이 바뀔 수도, 그게 당연한 본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먹고 자고 새끼치는 일의 조건을 어떻게 맞추어 사느냐 하는 것임을 새삼 느껴본다.

내일은 대목 전에 읍내에서 머리도 깎고 볼일 좀 보면 된다면서 부인에게 휴가 받아 놓았노라며 느긋하게 자러 들어가는 아저씨. 그제서야 이번 주가 추석임을 실감한다. 추석을 앞두고 소백산중에서 맞는 최고의 대목, 혼자 뿌듯하다.

이제 길었던 하루의 여정이 다하나 보다. 산골의 밤은 시간을 잊은 채 깊어가고 따뜻하게 데워진 방 자리에 누우니 그지없이 편안하다.

혼자 여행기분을 마음껏 즐기며 잠에 빠져든다.(그러고 보니 군에서 갓 제대하여 지리산 종주 이후 처음인 듯 하다) 이번 여행의 생각거리로 들고온 '너에게 나는 무엇인가'(우리 아이들이 열광하는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다) 생각도 못하고 내일 일정도 잡힌게 하나 없다. 그저 이 순간 편안하고 행복하다. 시계는 이제 10시 좀 지난 것 같다

저기 정상이 보이고, '에라이, 모르겠다'

자다가 빗소리에 눈을 뜬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개운한 기분에 일어날까 하다가 누워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에 빠져 든다.

문득 빨랫줄에 널어둔 옷가지 생각이 난다. 맑고 깨끗한 빗물에 온 몸을 적시고 있을 도시의 옷가지들, 복이다. 얼마나 잤는지 다시 눈을 뜨니 이제야 새벽이다.

비는 그치고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여닫이 문을 활짝 열어 젖힌 채 새벽을 호흡하며 기억나는대로 국선도를 따라 한다. 어제 죽령옛길을 오르고 난 뒤 몸상태가 찌뿌둥해서 은근히 걱정되었는데 이런 정도면 산행도 괜찮겠다 싶다.

단전호흡을 하고 마당이며 집밖이며 어슬렁거리다 들어오니 아저씨가 아침을 권한다. 겉으로 사양하며 속으로 먹고 싶었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시골밥상인가. 열무겉저리와 산나물 무침 그리고 미역국이다. 간도 맞고 국이 시원하다. 아주머니가 퍼주는대로 세 사발씩이나 먹는다. 그래 산행을 하는거야. 부석사나 고개넘어 단양구경을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쨌든 한가하게 구경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볼일 보러 나가는 아저씨를 기다려 읍내까지 태워다 주고 다시 죽령고개에 차를 갖다댄다.(가면서 동네 어르신 내외를 같이 태웠는데 주인아저씨가 흐믓해한다. 사는게 이렇게 신세지는 일이라고 하며, 공감)

a 비로봉 오가는 능선길 곳곳에 만들어진 나무계단들. 보고 걷는 재미가 좋다

비로봉 오가는 능선길 곳곳에 만들어진 나무계단들. 보고 걷는 재미가 좋다 ⓒ 이성홍


아침 9시, 주봉인 비로봉까지는 4시간이 걸린단다. 꽉 잡아 왕복 7시간에 다시 부산까지 4시간, 저녁에 독서실 갈 일을 생각하면 여간 무리가 아니다.(일요일 하루를 철희씨에게 맡긴데다 차운행도 해야되고, 아이들 줄 계란도 삶아가야 되고)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올라가면서 생각해보자. 표를 끊고 시멘트 포장된 능선길을 오른다. 허리에 신경써가며 제법 경사진 길을 천천히 오르는데 느낌이 괜찮다. 그러고 보니까 천문대까지는 계속 포장길을 가야 되는구나 생각이 미친다.

그렇게 시멘트길을 묵묵히 걷는데 구름 속으로 해가 난다. 상쾌하다. 드문드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송신탑을 지나고 샘터에서 물을 들이킨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국립공원 소백산 능선길을 기분좋은 햇볕을 받아가며 혼자서 걷는 기분, 호젓하다는 느낌이 어떤건지. 산 하나, 나 하나, 그리고 맛있는 샘물.

샘터를 지나 저만치 보이는 천문대, 생각보다 작아 보이는데 파란 하늘에 반짝이는 지붕이 선명합니다.(말투가 바뀌었네요. '에라이, 모르겠다') 천문대에 도착하니 제2연화봉, 여기서 비로봉까지는 연화봉 거쳐 4.2km.

그리 아득하지도 그리 가까이도 아닌 적당한 거리에서 "와 봐, 와 봐'하며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유혹에 넘어갔다간 저녁에 독서실 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고. 그래 정상가는 길이 훤하게 보이는데 간거나 진배없다고 다독여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정상을 좋아한다죠. 당연히 '못무도 고', 사람이 이렇게 해서 망가지는 거지요.

나름대로 산길, 그것도 능선길이니까 4.2km를 1시간에 가보리라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좁은 소로길에 군데군데 질퍽거리는 숲길을 지나기도 하고 탁트인 능선길에 바닥에 나무판을 대어 길을 만들고 계단을 만들어 재미있는 길을 걷기도 하며 가끔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경치도 지나치며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쉼 없이 걸어갑니다. 거기 정상에 뭐가 있기나 한 듯.

예상 밖으로 아니면 예상대로 걸린 시간이 1시간 20분, 비로봉은 옆 봉우리와 어깨동무하며 느긋하게 서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천지사방의 정경, 사람들이 이 맛에 정상을 찾는구나 싶습니다.

a 비로봉 정상에서 만난 아저씨, 아줌마. 이 날  산에서 만난 첫 사람이다. 아저씨의 발을 보시라. 맨 발이다.

비로봉 정상에서 만난 아저씨, 아줌마. 이 날 산에서 만난 첫 사람이다. 아저씨의 발을 보시라. 맨 발이다. ⓒ 이성홍

'반갑습니다'. 오늘 산 위에서 처음 만난 사람, 그것도 정상에서 만난 아줌마 등산객이 벤치에 앉아 인사를 건네는데 참 반갑데요. 얼른 반가운 인사를 맞잡고 스스럼없이 그 옆에 앉습니다. 마침 요기를 하고 있던 아줌마가 카스테라를 건네주는데 두 말도 않고 받아서 갖고간 두유랑 어제 달리기대회 때 꼬불쳐둔 쵸코파이랑 맛있게 먹습니다. 물병도 준비하지 않은 채 차에 두고 온 사과생각이 절로 납니다. 아줌마는 휴대폰으로 꽤나 긴 시간 오랜 친구와 통화를 하고 나는 이쪽 저쪽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번에는 아저씨가 비로사쪽에서 올라오고, 그런데 이 아저씨 맨발입니다. 그렇게 맨발로 산을 다닌지 2년 정도 되었다는 아저씨하고 한 방, 아줌마하고 한 방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려는데 아참 잊은 게 하나 있군요.

정상에서 필려고 아껴둔 마지막 담배 한 까치, 다시 비로봉 표지석에 걸터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습니다. 아줌마 하는 말, 이 좋은 공기 마시며 웬 담배냐고. 옳은 말입니만 옳다고 다 맞는 말이겠습니까. 땀 흘린 뒤 약간의 성취감과 함께 피워무는 담배 한 대, 그림이 떠오릅니까.

그런데 연봉으로 늘어선 능선길에서 주봉인 비로봉(1439m)에 서보니 오히려 건너편 국망봉(1420m)이나 반대편 재건너 묘적봉(1140m)이 더 높아 보였습니다. 맨발 아저씨 말, 원래 정상에 서면 다른 봉우리가 더 높아 보이는 법이라 합니다. 그러니 제 눈 탓할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제자리는 늘상 낮아보이고 주위 것들이 높아 보이는 것이 사람사는 이치인지도 모르지요.

다시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가는데 시간은 오후 1시 30분, 마음이 급해집니다. 혼자 속으로 '발은 바쁘게, 마음은 느리게' 하면서 하산을 서두릅니다. 돌아오는 길 진흙탕길에 난 발자국이 반갑습니다. 오늘 이 길로 올라온 유일한 사람, 내가 만든 발자국이니까요.

그런 와중에 오면서 보아둔 경치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런데 연화봉 오는 길에 보아두었던 숲그늘 속 빗물 머금고 있던 꽃봉오리를 끝내 못찾았습니다. 식물도감에서 본 듯한 평소에 잘못 보는 꽃인데 능선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놈이었는데 원래 귀한 모습은 가슴에 담아두는 법이라 다독이며 얼른 길을 서두릅니다.

다시 천문대를 지나고 샘터에 들러 거푸 물을 들이킵니다. 마침 샘터에서 담배피는 아저씨를 만나 보너스로 한 개피. 무슨 화두를 (산에 왔으니 좀 거창하게 말해도 괜찮을 듯) 들고 왔길래 저리 평상복에 구두차림으로 혼자 왔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저씨는 천문대 쪽으로 올라가고 나는 본격적인 하산길을 걷습니다.

시멘트 내리막길, 그리 유쾌한 산길은 아니지요. 급한 경사를 내려오면서 이 길을 쉬지 않고 올라온 것이 장하기도 하고 조금씩 무릎과 장딴지가 무거워집니다. 하는 수 없이 앞뒤로 손을 크게 흔들며 뒷걸음질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급한 길은 뒷걸음으로, 완만한 길은 속보로 번갈아 내려오면서 죽령매표소에 도착하니 4시 20분, 이제 제법 다리도 무겁고 허리도 뻐근합니다. 사과를 하나 까먹고 화장실에서 샌들과 러닝티셔츠 차림으로 갈아입고 정리운동을 합니다.(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뒤에 더 힘듭니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꿈같은 여정, 꿈같은 마무리

이제 나만의 1박2일(정확히 일요일 새벽 1시10분부터 월요일 오후 4시40분까지)의 꿈같은 여정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을 모두 내린 채 부산을 향해 나섭니다.

풍기 나들목에서 차를 고속도로에 올리고 비교적 한가한 대구까지 평소 잘하지 않던 과속운전을 합니다. 마음이 바빠서가 아니라 런닝티 차림에 불어오는 맞바람도 전혀 싫지가 않고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앞에 고속버스 한 대 세워두고 그 뒤를 쫓아갑니다.

대구 들어오는 금호 분기점에서 20여분간 정체하다가 비가 내리고 어둑해지는 저녁길을 밀리는 차들 따라 에어컨도 켜지 않고 달립니다. 멍하다거나 몽롱하다거나 하는건 전혀 아닌데 별 느낌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편안한 상태. 이러다가 도사되는건지도. 참 이번 여행의 생각거리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렇게 쉬지않고 부산에 도착하니 저녁 8시 무렵, 그런데 부산 진입하여 백양터널로 들어오기 전 차의 온도 게이지를 보니 (전에 고속도로에서 엔진을 태워먹은 적이 있어서 온도게이지는 자주 확인하는 편입니다. 거기다 냉각수 상태도 별로 안좋고 해서) 정상눈금에서 갑절이나 올라와 있습니다. 결국 탈이 난 것입니다.

겨우 집에 차를 세워놓고 앞 뚜껑을 여니 어디서 새는 소리가 나면서 김이 모락모락, 속세로 돌아온 티를 냅니다. 씻고 저녁먹고 아내에게 미리 부탁해놓은 삶은 계란을 들통에 담아 택시를 타고 독서실로 향하는데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비몽사몽, 오락가락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뒤에 일은 나도 모릅니다. 사람이 이렇게 망가지는 모양입니다.

덧글, 소백산 아저씨 이야기 중에 봄에 아카시아 꽃필 무렵 저녁먹고 마당에 나와있으면 이게 꿈인가 할 정도로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하다고 합니다. 5월 초 쯤 되나요. 그 때 한 번 가보실래요. 같이라도 좋고 혼자면 어떻습니까.

a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그 향기에 흠뻑 취한다는 수철리에서는 토종벌을 치기도 하였다는데 양봉에 밀려 더 이상 벌을 치지 않는다. 이 안내문을 만든 이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단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그 향기에 흠뻑 취한다는 수철리에서는 토종벌을 치기도 하였다는데 양봉에 밀려 더 이상 벌을 치지 않는다. 이 안내문을 만든 이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단다. ⓒ 이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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