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배달 아줌마가 예뻐서 뭐하냐고요?"

[새벽을 여는 사람들 52] 공익광고 찍은 봉천동 김봉금씨

등록 2003.12.17 20:18수정 2003.12.1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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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언제부터 썼는지 모르는 색 바랜 모자가 이젠 머리카락의 일부가 돼버렸다. 거꾸로 쓰는 야구모자와 손쓰림 방지용 비닐장갑, 그 위에 덧씌우는 하얀 면장갑이 작업복인 김봉금(52)씨.


홀로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에게 몰래 우유를 갖다 주는 공익광고 모델로 친숙한 그는 실제로 봉천동에서 20년 넘게 우유배달을 했다.

남원이 고향인 김씨는 서울 봉천동으로 시집와 지금껏 30년 넘게 생활터를 지켰다. 아무 것도 모르는 꽃다운 나이 스물.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잘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봉천동 산동네의 주소 없는 오두막살이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바람 잘 날 없는(?) 과거’를 돌아보며 “내 인생을 풀면 소설이 몇 권이야”라며 사람 좋은 눈웃음을 친다. 큰아들이 중학생이 되던 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빠가 돌아가셨다"며 삼남매가 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유언도 없이 그게 끝이었다.

“철없는 나이에 애가 줄줄이 셋이에요. 산동네 오두막살이에서 그 나이에 내가 어땠을 것 같아요? 앞이 깜깜하지 않았겠어요? 처음엔 나 혼자 두고 간 남편이 미워 몇 년간은 생각조차 안했어요. 내가 아무리 잘 웃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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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삼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신세 한탄할 틈도 없었다. 잠은 틈나는 대로 자고 정해진 공휴일 외 몸이 아파 딱 한번 쉬어봤다. 김씨는 이뤄 놓은 것 많은 인생에 자랑할 것도, 감사할 것도 많다며 여전히 웃는다.


김봉금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첫째 모든 걸 긍정적으로 본다. 둘째 목표가 있으면 끝까지 밀어붙인다. 셋째 자존심을 지킨다. ‘삼남매를 굶어죽이지 않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우유배달이라는 고집스런 외길 인생을 걸었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기에 언제나 웃을 수 있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없이 홀로 삼남매를 키웠다.

“나 자랑할 거 되게 많아요. 내가 배운 건 없어도 내 손으로 자식들 다 키우고 집도 마련하고 또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광고도 찍었잖아요(웃음).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아직까지 우유배달 하면서 사고 한 번 난 적 없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아이들도 스스로 알아서 잘 자란 덕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고생 한 적은 없어요. 아무래도 먼저 간 남편이 하늘에서 우리가 잘 되게 지켜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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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지대가 높은 봉천동 일대는 겨울이 가장 곤욕이다. 얼굴을 마구 할퀴려 드는 고지대의 새벽 바람은 고개를 자꾸만 땅으로 떨구게 하는데. 20년 넘게 비바람 맞은 피부이건만 김씨의 얼굴은 그 흔한 잡티 하나 없이 곱기만 하다. 이 또한 그에겐 자랑거리라며 자신도 엄연히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자’임을 수줍게 고백한다.

처음엔 광고 촬영에 대해 “뭐 그냥 그랬어요…. 별로 좋을 것도 없었어요”라며 감정 표현을 아꼈던 김씨.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자 “사실은 어떻게 나올지 설레어 이틀 동안 잠도 못 잤다(웃음)”며 결국엔 천진한 웃음을 들키고야 말았다.

“아휴… 얼굴도 크고 코도 납작하고. 좀 예쁘게 찍어 달랬더니 우유배달 아줌마가 예뻐서 뭐하냐고 그러더라구요.(웃음) 나도 다이어트도 하고 쉴 때는 예쁘게 단장해 친구들 만나는 여자예요.”

피부는 고와도 20년을 넘게 뛰어다니다 보니 양 무릎이 말썽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며 “어떻게든 살게 되더라”고 담담히 말했다.

우유를 배달하는 리어카가 오토바이로 바뀌고 일의 양을 줄이자 관절염도 거짓말처럼 나아졌다. 그는 무릎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하고 싶다며 삶의 강한 의지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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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좀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는 김씨였건만 그도 사람인데 왜 궂은 날이 없을까. 아무리 가깝고 착한 자식이어도 그의 노후와 인생을 같이 나눌 수는 없는 법.

김씨는 집안의 경조사나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남편이 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비록 내세엔 떨어져 있지만 사후에서만큼은 같이 묻혀 항상 옆에 있고 싶다는 바람을 덧붙이며.

“신세 한탄하는 거 싫어요. 시간도 아깝고 이왕 그렇게 된 거 어쩌겠어요. 저도 고생 안하고 살면 좋겠죠. 가끔 자다 일어나 혼자 마시는 술로 마음을 달래요. 난 워낙에 긍정적이어서 술 마시면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다시 또 힘을 얻고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일 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사는 게 바빠 그 흔한 드라마 한번 제대로 본적이 없다. 지병처럼 달고 다니는 ‘감기’는 ‘아픈’ 축에도 끼지 않는다. 김씨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세상에게 되돌려 받았다며 예의 그 건강한 웃음으로 거짓말 하지않는 ‘땀’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불현듯 자신을 ‘산동네 체질’이라고 덧붙이는데….

“아파트는 아무리 우유를 돌려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어 재미가 없어요. 주택은 서로 얼굴 보는 맛이 있어 좋은데. 아파트는 직접 돈을 받으러 가도 인터폰으로 말하고 또 곧 지로용지로 넘어가 버려 사람들이 박해진 것 같아요.

공익 광고처럼 예전엔 정말 우유 하나 덜 주고 더 줘도 서로 나눠 먹는 것처럼 여겼는데 지금은 먹은 우유 값도 안 내려 해요. 세상이 점점 살벌해 지는 것 같아요. 봉천동이 예전 산동네일 때는 정말 정도 많고 사람 냄새도 나고 좋았는데. 아마 과거의 추억 없이 근래에 우유배달을 시작했다면 재미없어서 그만 뒀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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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오늘따라 6년 전부터 타고 다닌 오토바이가 말썽이다. 갈 지자 춤을 추며 비탈길을 오르는 오토바이가 말썽을 부려 최초로 접촉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 지나갔다. 겨울철 그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눈’이다. 눈 쌓인 비탈길을 우유 실은 오토바이로 오르는 것에 대해 그는 “어떨 것 같아요?”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삼남매를 출가시켜야 하기에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김씨. 내년 즈음엔 자신을 위해 일을 줄이고 새 인생을 준비하고 싶노라 조심스레 고백한다.

그는 ‘한’이 돼버린 학업의 열정을 풀고 싶지만, 50줄이라는 나이가 걸린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어느새 컴퓨터, 영어, 수영 등 배우고 싶은 것들을 열거하는 김씨의 표정이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청춘으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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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내 소원이 뭔지 아세요? 이 오토바이가 고물이라 그렇지 나 운전 되게 잘하거든요! 내가 좀 와일드 한가봐요!(웃음) 아직까지 차가 없는데 돈 벌면 자가용 사서 직접 운전하며 여기저기 마음대로 막 여행 다니고 싶어요!”

뛰어다니느라 숨이 차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씨가 힘차게 소원을 내뱉는다. 공부도 하고, 예쁘게 단장해 친구들과 만나고, 와일드하게 자동차 여행도 하고픈 김씨. 힘겹게 달려왔던 어제를 뒤로 이제야 삶에 묻혔던 자신의 꿈을 살피려 한다.

마지막으로 말 많고 탈 많은 대한민국 속에서 당당히 삶을 꾸려간 김씨가 나랏님께 당부한다. 그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서민들이 정직하게 땀 흘린 만큼만 얻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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