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대가리'는 오밤중에 홰를 칩니다

케케묵은 '빨갱이' 외쳐대는 요즘 정치판과 닮은꼴

등록 2003.12.18 10:06수정 2003.12.1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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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네 마리의 암탉과 한 마리의 장닭이 있습니다. 녀석은 요즘 목청 높여 홰를 칩니다. 하지만 닭들이 홰를 친다고 하여 다 새벽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에 홰를 치는 닭이 있고, 오밤중에 홰를 치는 닭이 있습니다. 오밤중에 홰를 치는 놈은 마지못해 홰를 치다 맙니다.


a 우리 집 장닭과 그의 암탉들. 한 마리의 장닭이 보통 예닐곱 마리 이상의 암탉을 거느립니다.

우리 집 장닭과 그의 암탉들. 한 마리의 장닭이 보통 예닐곱 마리 이상의 암탉을 거느립니다. ⓒ 송성영

요즘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닭이 홰치는 소리와 닮아 있습니다. 앞장서서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개혁하겠다고 목청 높이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후자의 목소리는 눈가림으로 은근슬쩍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려는 잔꾀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오밤중에 홰치는 닭과 닮아있습니다. 오밤중에 홰를 치고도 새벽이 왔다고 요란을 떠는 닭은 그야말로 '닭대가리'입니다. 마지못해 그것도 오밤중에 홰치는 것은 새벽이 아닌 암흑 세상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는 동네 시끄럽게 꼭 오밤중에 홰를 치는 닭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서는 오밤중에 홰치는 닭은 재수 없다하여 제일 먼저 잡아먹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역시 오밤중에 홰를 치던 놈은 일찌감치 저승길로 갔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장닭 또한 오밤중에 느닷없이 홰를 칠 때도 있지만 주로 새벽녘에 홰를 칩니다. 오밤중과 새벽을 구별할 줄 아는 놈입니다. 흔히들 말하는‘닭대가리’가 아닙니다. 그야말로‘닭대가리들’은 새벽과 오밤중을 구별할 줄 모르니까요.

달포 전쯤에 우리 집 마당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출판 기념회라고 해봤자 주변에 알고 지내는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조촐한 자리였습니다.

이 날을 기해 오밤중에 홰를 쳐대고 알조차 낳지 못하는 닭들을 잡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글쎄 손님들이 찾아오기 이틀 전부터 알을 낳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입맛 다신 손님들 생각하면 좀 미안하긴 했지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닭도 목숨 건질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대로 유정란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올 봄에 공주 오일장에 가서 갓 부화된 병아리를 30여 마리 사왔습니다. 여름 내내 찾아오는 손님들 몸 보신 시켜주고나니 장닭 한 마리에 암탉 네 마리만 남아 있었습니다. 헌데 장닭은 주로 오밤중에 홰를 치고, 암탉은 알 낳을 시기를 훨씬 지났는데도 도무지 알 낳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 지난 초여름 캠코더로 찍어 놓은 우리 집 영계들

지난 초여름 캠코더로 찍어 놓은 우리 집 영계들 ⓒ 송성영

그동안 대나무 밭에 쑥쑥 솟아오르는 죽순이며, 풀이며 썩기 일보직전인 호박이며 주변에 돈 안들이고 먹일 수 있는 온갖 영양식을 먹이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마침 절친한 사람들 얼굴 볼 일(출판기념회)이 생겼으니 내친 김에 잡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질 좋은 유정란을 뽑아 먹고 또 봄이면 알을 품도록 하여 두고두고 길러보겠다는 놈들이었기에 잡아먹기가 아쉬웠습니다. 녀석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닭이 너무 살이 찌면 알을 낳지 못한다는 주변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먹이를 적게 주고, 닭장을 지나칠 때마다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야이 닭대가리들아, 니들 알 안 낳으면 죽어…. 그 만큼 먹여 줬으면 알 좀 낳아라, 니들 좋고 우리 좋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그리구 너 장닭! 이눔 새끼야, 제발 동네 시끄럽게 오밤중에는 빽빽거리지 좀 말어, 그러다가 정말로 죽는다.”

나야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닭들 입장에서 보면 살벌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닭들은 주인의 살기를 감지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알을 낳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먹이를 적게 줬던 것이 크게 효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풀이나 나무들도 좋고 나쁜 기운을 느낀다고 하는데 아무리 '닭대가리'라고는 하지만 목이 비틀어지게 될 위기를 왜 몰랐겠습니까?

a 얼마전 부터 초란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알에 비해 초란이 훨씬 작습니다.

얼마전 부터 초란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알에 비해 초란이 훨씬 작습니다. ⓒ 송성영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지금까지 네 마리의 암탉들은 번갈아 가며 알을 쑥쑥 잘도 낳아주고 있고, 장닭 역시 오밤중이 아닌 새벽녘에 홰를 칩니다.(매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알 잘 낳아주고 새벽을 알려주는 놈들이 고마워 김장하고 남은 배추를 통째로 뽑아주기도 하고 또 비싼 사료도 먹이고 있습니다.

우리 집 장닭은 이제 오밤중에 홰치는‘닭대가리’가 아닙니다. 새벽과 오밤중을 가리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것도 꼭 오밤중에만 홰를 쳐대는 어떤 정치인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지난 과거를 반성할 생각은 않고 케케묵은 '빨갱이'까지 운운하며 오밤중에 홰치는 소리만 합니다. '빨갱이' 운운하면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었던 암흑기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분명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정치판을 만들어 나가려는 정치인과는 다릅니다. 누가 오밤중에 홰를 쳐 정치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지 누가 진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닭대가리’가 아닌 이상, 판가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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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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