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나도 털실목도리 생겼다!"

거부가 아닌 긍정의 사랑으로

등록 2003.12.22 06:54수정 2003.12.2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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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이 되면 쉬는 시간에 털실로 뜨개질을 하는 아이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그런 아이들은 필시 남자 친구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고 이렇게 딴청을 부려보기도 합니다.

"선생님 겨울에 추울까봐 목도리를 짜고 있구나. 고마워서 어떡하지?"

이에 대한 반응도 가지각색입니다.

"예? 이거 선생님 드릴 것 아닌데…"

이렇게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싱거운 농담인줄 알고 그저 웃음만을 흘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식으로 매몰차게 말을 내뱉은 아이도 있습니다.

"선생님 목도리를 제가 왜 짜요? 꿈도 크셔라."

며칠 전, 첫눈이 왔을 때의 일입니다. 수업을 하고 있다가 첫눈이 내리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달려가면서 환호성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환호성 뒤에 들려온 말이 문제였습니다.

"첫눈이 오는 것을 선생님하고 보다니."


처음엔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의 표정을 보고서야 첫눈을 남자 친구가 아닌 늙은 선생님과 함께 맞이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말을 그렇게 해놓고는 미안했는지 금방 말을 바꾸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오십. 아직은 만으로 40대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럴 수 있는 날도 불과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교사로서 나이를 먹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경륜이 쌓이는 것이니 아이들에게는 더 유익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것과 올해의 경험을 비교해보아도 그렇습니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일에 조금은 더 익숙해집니다. 교육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너무 나이를 먹어 담임을 맡게 되면 아이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은근히 두려운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심사인줄도 모르고 첫눈 어쩌고 했으니 제 마음이 상한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한 마음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린 아주 행복한 일이 다음날 제게 생겼습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담임을 맡은 아이는 아니지만 자주 대화도 나누고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는 아이입니다.

"선생님, 학교 끝나고 도서관에 계실 거예요?"
"왜? 오래 있지는 않을 건데."
"어떤 애 책상 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어서 갖다 드리려고요."
"그래? 그럼 네가 올 때까지는 여기 있을께."

책을 제때 반납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을 알고 고맙게도 신경을 써주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나타난 아이는 제게 책을 먼저 건네고는 뒤이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털실로 짠 목도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저는 잠깐 동안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뜻밖이어서 그 주인이 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일주일 동안 짰어요. 색깔은 회색이 질리지 않고 무난할 것 같아서 제가 그냥 골랐는데 마음에 드실 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한 번 차보세요."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이 손수 짠 털실 목도리를 목에 걸어주는 아이에게 저는 고마운 마음 이상의 어떤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당당하고 예쁜 모습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그 아이는 이전에도 자신이 직접 만든 초콜릿이 든 빨간 상자를 저에게 선물로 준 적도 있고, 가끔 사탕 같은 것을 손에 쥐어주고 가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제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조바심을 내곤 했습니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봐요. 제가 이러는 거 귀찮지요? 솔직히 귀찮으면 귀찮다고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괜찮으니까요."

이런 말을 한두 번도 아니고 너무 자주 말을 한다고 싶어질 무렵, 하루는 메일로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저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기쁜 것 같지도 않고요. 그리고 저 걱정 별로 안 해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그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고 마음의 준비를 지금부터 다듬고 있거든요. 초, 중학교 다닐 때 졸업식만 되면 질질 눈물 짜고 그랬는데, 이제는 안 그럴 거예요.'

제가 만약 그 아이를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아끼고 기뻐하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속도가 빨랐거나 멈추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많았겠지요.

학문적 호기심이 남다르고 사회적 자아가 발달되어 있으면서도 과거의 세월을 통해 어딘가 손상을 입은 듯한 흔적이 엿보이는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공의의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나이 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무렵 제가 그 아이에게 준 편지의 내용입니다.

'수업시간마다 부족한 선생님을 기다리고 보고싶어하는 우리 혜진(가명)가 있어서 난 정말 행복하단다. 넌 언제나 내게 귀한 제자야. 한 가지, 네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다면 남의 시선쯤은 개의치 않는 네가 되었으면 한다.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할까 조바심 같은 거 갖지 말고. 그리고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순간 순간들은 뜨겁고 당당하게 향유할 수 있는 네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널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널 만날 거야.'

이런 편지들이 혜진이에게 자신감과 정당함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수업을 하다가 문득 보니 혜진이의 눈빛에서 무언가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맑고 깊은 눈빛 속에는 세상과 학문에 대한 호기심만이 가득 차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 변화된 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하게 하는 것은 거부가 아닌 긍정의 사랑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혜진이와 저는 지금도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 편지를 읽어보면 교사와 제자 사이에 오고간 편지라기보다는 친한 동무들끼리 주고받은 편지 같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혜진이는 제 친구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사랑의 표현을 할 줄 아는 멋진 친구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젊게 살도록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한없이 고마운 친구입니다.

올 겨울 내내 저는 제 동무인 혜진이가 손수 짜준 털실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다닐 것입니다. 학교에서든 거리에서든 다른 아이들을 만나면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야, 나도 털실목도리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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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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