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화가 해피 엔딩은 아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헤르만 헤세의 <환상 동화집>

등록 2003.12.24 14:30수정 2003.12.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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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환상 동화집>
책 <환상 동화집>민음사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헤르만 헤세가 동화를 썼다는 것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니다. <환상 동화집>은 헤세가 지은 동화들을 한 데 모아 출판한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헤세의 동화 작품들은 꽤 많다. 그리고 '동화'라는 특정 양식 속에서도 헤세 특유의 환상적이면서 철학적인 문체가 잘 살아 있다.


<데미안>에서 느껴졌던 약간의 신비주의적 태도가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에서는 더욱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 <난쟁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취한다.

늙은 이야기꾼 체코가 어느 날 저녁 부둣가에서 들려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 난쟁이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 속 이야기'이다.

"여보게들, 자네들만 좋다면, 오늘은 내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겠네. 한 아름다운 여인과 난쟁이, 사랑의 묘약, 믿음과 불신,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야. 물론 모두, 옛날이든 요즈음이든, 이야기나 모험담에 흔히 나오는 내용이지만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동화는 이 이야기꾼이 말하는 것처럼 모험담에 흔히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결말이 무척이나 비극적이고 슬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해피 엔딩의 동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한 여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난쟁이는 그녀의 남편이 자신이 분신처럼 아끼는 강아지를 버리자, 실의에 빠진다. 결국 자신이 포도주에 넣은 독을 여인의 남편과 함께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죽음 앞에서 생각하는 내용은 한 인간의 비참한 삶에 대해 다시금 회상하게 만든다.

"그는 도시 쪽으로 뒤돌아보면서 조금 전까지 골몰했던 생각들을 상기해 보았지. 말없이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어. 단조롭고 가련한 삶…. 바보들의 시중이나 드는 현자의 삶, 한편의 공허한 코미디 같은 삶을 말일세."


무슨 동화가 이렇게 우울하냐고 비판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헤세는 동화라는 환상적 양식을 빌어 철학적 성찰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그래서 동화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보다는 어른들이 읽기에 적합한 동화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경 묘사 또한 우울한 경우가 많다. 사랑과 질투로 인해 사람을 죽인다는 내용이 담긴 <그림자 놀이>에 등장하는 성(城)은 일반적인 동화의 아름다운 성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곳의 좁은 정원은 로마 시대부터 텅 빈 채로 서 있는 거대한 탑에 가리어 어두웠다. 성벽은 어둠침침하고 축축했으며, 창들은 좁고 낮았다. 그늘진 정원 바로 곁에는 오래된 단풍나무와 포플러나무와 너도밤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어두운 공원이 있었다."

헤세 작품 특유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또한 동화들 속에 담겨 있다. <지글러라는 이름의 사나이>라는 작품에서는 지글러라는 한 인간을 통해 일반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모습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지글러는 그런 사람들이 늘 하는 일을 모두 하면서 살았다. 그에겐 재능이 없지 않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돈과 쾌락을 좋아하여 멋진 옷을 즐겨 입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비겁하기도 했다. 그의 삶과 행동은 욕구와 노력보다는 금지, 벌에 대한 두려움 등에 의해 더 좌우되었다."

어느 날 동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지글러는 인간들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동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병원에 감금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인간들의 부정적 측면을 꼬집는 또 다른 작품은 <다른 별에서 온 놀라운 소식>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 죽이고 죽어 가는 사람들. 그 별의 왕은 전쟁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것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우리 모두는 전쟁의 선동자가 아니라 그저 희생자일 뿐"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평화로운 별에서 온 젊은이는 이 왕이 말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생각하기엔 전쟁이란 것이 정말 필요 없는 것이며, 인간들이 스스로 일으키는 이상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가 온 별에서는 이와 같은 싸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한 별나라의 왕에게 던지는 젊은이의 질문은 인간 정신의 회복을 촉구한다.

"이곳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자신들이 지금 옳지 않은 것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중략) 아무도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고, 인간들이 서로 명랑함과 아껴주는 마음을 지니고 만나는, 그처럼 다르고 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자면서라도 꾸어본 적이 없나요?"

젊은이의 이 메시지는 결국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동화'라는 환상적 매체를 통해 이야기될지라도, 그 안에는 삶의 깊은 성찰과 의미가 담겨 있다. 래서 이 책은 어른들이 읽어야만 할 환상적 이야기이다.

환상동화집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서웅 외 옮김,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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