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고픈 크리스마스 선물

일본 초등학생들이 보내준 감사편지

등록 2003.12.25 10:36수정 2003.12.2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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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 유치원생 아이를 둔 전업주부, 결혼 9년차,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땅, 이쯤되니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선물 하나 주는 이 없네요. 문명의 이기 덕분에 성탄절의 메시지는 진작 전화와 이메일로 받았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감사해야지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이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날이면 괜히 이놈의 타국살이가 더 외롭고 서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올 크리스마스엔 제게도 여러분께 자랑하고픈 선물이 한가지 있답니다. 11월 27일에 저희 동네 초등학교의 3학년 2반에서 일일교사를 했노라고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그 수업 후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는데, 급기야 지난 22일엔 아이들로부터 한가지 선물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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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웃이자 친구인 오꾸다상 집에서 팥죽을 먹고 돌아온 날 저녁에 그 집 큰 아들이 저희 집엘 왔습니다. 남은 팥죽이라도 가져왔나 싶어 나가봤더니, 커다란 서류봉투를 내미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다고요.

내가 뭘 두고 왔던가 되짚어 보며 봉투를 열어보니 짙은 분홍색 리본이 매어진 색지 뭉치가 나왔습니다. 표지에는 '장영미 선생님께, ㅇㅇ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씌어있었습니다. 재빨리 속을 살펴보니 아이들이 보낸 감사의 편지가 여러 장 묶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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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정말 기뻤습니다. 가져다 준 아이에게 제가 무척 기뻐하더라고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전해달라고 이르고 아이를 돌려보냈습니다.

예쁜 종이와 리본을 보더니 딸아이가 더 관심을 보이며 달려듭니다. 큰 소리로 읽어주었더니 이제는 아예 제 것처럼 가지고 놀려고 합니다. 안된다고, 그건 엄마의 소중한 물건이니 달라고 해도, 그러니까 자기가 더 오랫동안 잘 보관해 주겠다며 자기에게 달랍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낫지, 6살 짜리에게 그걸 맡길까봐요. 조금만 가지고 놀다가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고 잠시 맡겨두었습니다.


얼마 후 되찾아 사진도 찍어두고,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가지 간식, 옷, 스포츠, 명물, 놀이에 대해, 그리고 한국책 ‘아씨방 일곱동무’에 대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요리는 정말 맛있게 생긴 것 뿐이네요. 한국 요리 ‘전’을 만들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다른 재료로 만든 ‘전’도 먹고 싶습니다. (타노구찌 유끼에)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게 된 것은 ‘전’의 종류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사또 와따루)

지난 번엔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을 간식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건 몰랐습니다. (사노 긴따)

우리는 일본사람이니 그렇지만 장영미 선생님은 훌륭하시네요.(일본어를 잘한다는 얘기 같음) 여러가지 물건과 책을 가져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이라는 요리를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오하라 쇼타로)

지난 달엔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침개가 ‘전’의 한 종류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꾸다 칸지)

‘전’은 여러가지 채소와 재료를 부친 요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오자와 료타)

전 ‘일본 팀’이었습니다만, 한국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전’이 맛있어 보였습니다. (이찌노세 타꾸미)

지난 번엔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며, 또한 다른 나라를 폭넓게 이해하자’ 제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타까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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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제 수업이 끝나고 일주일 후, 그동안 아이들이 조사했던 6개국의 요리를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웃의 오꾸다상도 자원봉사로 아이들의 요리실습을 도우러 갔었습니다. 다녀온 후, 예의 그 감자전을 만들었다며, 캔에 든 참치도 넣었는데 아주 맛있었다고 제게 얘기해 주더군요.

선생님께 좋은 분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씨방 일곱동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더군요. 일본어로 번역해 읽어준 후,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빨강 두건 아씨가 일곱동무 모두의 소중함을 깨닫고 화해하는 장면을 한글로 읽어주었더랬습니다.

빨강 두건 아씨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나쁘게 말을 했어. 너희들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들 중에서 누구하나라도 없으면 일은 안되구말구.”

빨강 두건 아씨와 일곱동무는 서로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다시금 아이들이 귀기울여 듣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꾸다상에게 전해들으니 한글로 읽는 것을 들었을 때, ‘한글의 울림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더랍니다.

그 후,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간략히 번역하고, 기사가 배치된 주소를 복사해, 감사의 내용을 담아 선생님 앞으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전부 번역을 했지요. 다음 날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과 함께 제 기사를 보았노라며 모두들 감탄을 했다는 답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오꾸다상으로부터 제가 선생님께 보낸 메일 전문을 가정통신문으로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몹시 부끄럽기도 했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이 기뻐해준 것 같아 뿌듯하더군요.

오꾸다상은 제가 번역한 마지막 부분에 동감한다며 평소 자신의 지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동감하는 부분이 있으니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겠지요.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6개국에 대한 발표가 전부 끝난 후 아이들이 세계에 대해, 한국에 대해 좀 더 많이 이해하고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 혹은 '나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발상'이 이문화(異文化)간, 이국(異國)간 충돌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어릴 때부터 낯선 문화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되 존중할 줄 아는 자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세계 평화와 화합에 기여하는 재목들이 되길 기원한다.


어느 한낮의 꿈처럼 잠깐 새에 끝나버릴 줄 알았던 초등학교에서의 수업은 이후 많은 여운을 가져왔습니다. 아이들로부터 크리스마스에 즈음해 멋진 편지를 선물 받은 것으로 일단 그 여운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라기는 그 여운이 아이들 마음 속에 계속 남아 훗날 한국을 아름답게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제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자랑할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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