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등학교 교단에 서다

일일교사가 되어 ‘전’에 대해 가르치던 날

등록 2003.12.02 16:34수정 2003.12.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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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아침 9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교장 선생님과 마주앉아 뜨거운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한국에서는 김치와 같이 매운 음식을 어릴 때부터 먹느냐고 물으셨다. 물론 어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되면서 자연스럽게 먹게되지만 요즘은 서양화된 식단에 익숙해진 결과 아예 못 먹는 아이들도 있다고 대답했다. 오늘 내가 하게 될 수업이 한국음식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물으신 것이었다.

곧이어, 수업준비가 되었노라며 선생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준비물로 가져온 꾸러미를 들고 교실로 들어섰다. 40명이 채 안 되는 3학년 2반 학생들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 중에는 대여섯 명 정도의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a 우리 동네 초등학교의 3학년 2반 아이들

우리 동네 초등학교의 3학년 2반 아이들 ⓒ 장영미

그날은 내년에 우리 아이도 입학하게 될 초등학교에서 일일교사로 교단에 서는 날이었다. 종합학습 시간에 '채소를 통해 세계를 알자'라는 주제로 미국, 중국, 한국, 독일, 인도, 일본의 요리 중에 채소를 이용한 요리를 한가지씩 정해서 조사를 하고, 각국 사람들을 초빙해 설명을 듣는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약 3주 전, 아이를 같은 유치원에 보내는 오꾸다상이 가정통신문을 보여주면서 이러저러한 취지로 자원봉사 할 외국인을 소개해 달라는데 나를 소개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처음엔 한국요리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하길래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인 줄 알고 좀 주저하기는 했지만,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마다하지 못하고 승낙을 하고 말았다.


며칠 뒤 담임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응해줘서 "고맙다"며 아이들이 '전'에 대해 조사를 할 것인데 그것을 듣고 코멘트를 해주고,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간단해 보여서 흔쾌히 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국의 물건이나 한국에 대해 알려 줄 만한 것이 있으면 소개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길래 "그러마"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떠올려 보니 '한국의 물건'이라고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이사오면서 되도록이면 짐을 간단히 하느라고 있던 것도 다 두고 온 형편이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시어머니께서 딸아이에게 입혀보고 싶다며 한복 일체를 장만해 보내주셨던 게 생각났다. 3학년 학급에서 조금 작은아이라면 입혀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 그 때, '초등학생이 좋아할 만한 즐거운 어린이 책'이라는 책을 보고 있었는데, 거기에 한국의 그림책 몇 권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 중엔 한국에 있을 때 딸아이에게 사주었던 '아씨방 일곱동무'라는 책의 번역본도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아씨방 일곱동무'는 조선 후기의 한글 수필인 '규중칠우쟁론기'를 아이들에게 맞게 엮은 것으로 한국적인 색채와 그림이 인상적인 그림책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순식간에 수업계획이 좌르르 세워졌다.

a '규중칠우쟁론기'를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엮은 '아씨방 일곱동무'

'규중칠우쟁론기'를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엮은 '아씨방 일곱동무' ⓒ 장영미

먼저 '전'에 대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요리책 2권에 실린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이 물씬 풍겨나는 '아씨방 일곱동무'를 읽어준 후, 빨간 두건 아씨와 일곱동무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을 한복과 노리개, 복주머니, 버선, 등을 보여주고, 입혀보면 아이들도 흥미로워할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되다니 좋은 징조였다.

세월이 어찌 이리도 빠른 것인지, 멀게만 느껴지던 수업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막상 전날이 되니 그때서야 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당의와 치마, 두루마기, 배자, 조바위, 꽃신, 꽃버선, 댕기, 속치마, 고쟁이에 오색자수의 주머니, 노리개 등을 주섬주섬 챙기며 새삼 시어머님의 정성과 지혜로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일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라며 이렇게 꼼꼼히 챙겨서 보내주셨는데, 그걸 받고 나는 아깝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라고 아이에게 이렇게 고운 한복을 입혀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마는, 별로 입을 일도 없는데다 금방 커버릴 아이를 생각하고는 부질없이 돈을 쓰셨다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 학교는 120년 역사를 지녔다 하는데, 교사(校舍)가 낡긴 했지만 메이지 시대의 건물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교실바닥에 깔린 낡은 나무판이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교실의 앞쪽 칠판에는 오늘 수업의 순서가 적힌 종이와 각 나라별 공통 질문과 답을 적는 표가 붙어있었다. 뒷쪽 칠판과 벽에도 각 나라에 대해 조사한 내용들이 가득 붙어있었다. 한쪽에는 태극기도 그려져 있고, 부채춤을 추는 사진도 붙어있었다.

열흘 전 쯤 이 학교의 공개수업이 있던 날, 일부러 이곳 3학년 2반 수업을 보러 왔었다. 내년에 우리 아이가 입학할 학교를 미리 둘러본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내가 난생 처음 서게 될 교단을 현장 답사하려는 뜻도 있었다. 아이 때문에 수업내용을 찬찬히 들을 수는 없었으나 언뜻 보니 조사 방법과 수단, 내용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짐작컨대 '종합학습'이란 이름으로 '프로젝트 접근법'식 수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아이들 스스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 조사하는 과정 중에 외국인을 직접 초대하여 얘기를 들어보는 방법이 포함된 모양이었다.

드디어 인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두 아이가 사회를 맡아 순서를 진행했다. 일본 동요에 이어 피리 연주, 일본의 전통 손놀이를 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아마 외국인 초빙 교사들을 위한 것 같았다. 칠판에 붙어 있는 표를 보니 미국, 중국에 이어 내가 세 번째였다.

a 수업의 진행을 적은 표와 각국의 공동 질문표

수업의 진행을 적은 표와 각국의 공동 질문표 ⓒ 장영미

6명의 아이들이 한 조가 되어 '전'만드는 방법을 발표했다. 선생님께서 내게도 발표내용의 복사본을 주셨다. 발표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을 수가 없었는데, 복사본을 살펴보니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이 아니었다.

감자를 삶아 으깨서 부추와 달걀물을 섞어 프라이팬에 지지는 과정이 적혀있었다. 난 그만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이런 감자전도 전인 것은 맞지만 '전의 응용편'이나 '현대판 전'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 아이들이 조사한 감자전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

아이들이 조사한 감자전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 ⓒ 장영미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했으니 내가 코멘트를 잘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리려는지 마침 내가 가져간 요리책에 '참치나뭇잎구이'라는 요리가 실려 있었다.

참치와 으깬 감자 등을 섞어 나뭇잎 모양으로 굽는 것으로 아이들이 발표한 전과 아주 비슷한 것이었다. 전체 아이들에게 그 사진을 돌려서 보여주고, 사실대로 전의 응용편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아이들 간식으로는 그만이라고 너스레도 떨었다.

내가 가져간 요리책을 보여주면서 전이 어떤 것이며, 어떤 재료들로 만드는지, 어떤 때 먹는 음식인지 설명했다. 선생님이 사진을 보시고는 일본의 덴뿌라(튀김요리)와 비슷해 보이는데 조리방법이 다른 것 같다고 부연을 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팬에 지지는 것과 튀기는 것의 차이를 빼면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인다. 나라마다 조리법이나 먹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기 맛있는 채소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었을 것 같다.

다음은 한국 물건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보자기를 펼쳐 '아씨방 일곱동무'를 꺼내 소개를 하고 간단하게 번역하여 읽어 주었다.

처음에는 소란스럽던 아이들도 책장이 넘어감에 따라 까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서로 맡은 바 역할이 다르므로 모두 소중할 뿐더러, 서로 돕고 각자 최선을 다했을 때 비로소 훌륭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아이들도 이해했을 것이다.

빨간 두건 아씨와 일곱동무들이 만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자 교실은 이내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선생님이 얼른 제일 작아 보이는 아이를 앞으로 보내셨다. 각 종류의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해주며 하나씩 입혔다.

색동 소매에 노란 당의, 진분홍 치마가 화사하게 빛났다. 댕기도 매어주고 조바위도 씌웠다. 배자와 두루마기는 다른 아이가 입었다. 어떤 사내 아이는 버선을 제 발에 끼워보고, 또 어떤 아이는 꽃신에 큰 발을 끼우느라고 안감힘을 쓰고 있었다.

a 모델이 되어 준 두 어린이

모델이 되어 준 두 어린이 ⓒ 장영미

아이들의 소란함 속에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내 설명을 듣고 혹시 아이들이 못 알아 들을새라 다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시던 선생님이 한복을 입은 아이에게 3학년 1반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라며 보내셨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공통질문에 답할 시간이 되었다.

간식, 옷, 스포츠, 놀이, 명물 순이었다. 앞서 한 중국의 답이 재미있다. '간식은 별로 먹지 않고, 옷은 일본과 같다' 일본이나 한국, 중국 등 동양의 나라들도 여러 면에서 서구화되어 간식이나 옷, 스포츠 등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진 것 같다.

다음은 자유질문 시간, 한국 아이들에겐 어떤 브랜드의 옷이 유행인가? 어떤 스포츠가 인기가 있나? 어떤 게임을 좋아하나?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은? 어떤 만화를 즐겨 보는가? 등등. 과연 내가 아이들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 준 건지 모르겠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는 있지만 내 경우가 전부는 아닐 테니 말이다.

어느 덧 1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선생님께선 내게 30분 정도 시간을 내달라고 하셨는데 두 배는 더 지났다. 이 학교는 수업종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작할 때도, 중간에도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아 죄송했지만 그만큼 수업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기뻤다는 아이들의 감상을 듣고 수업을 끝냈다.

선생님은 여러가지 물건을 보여주어서 고맙다며 다른 반, 다른 학년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단다. 또 연락해도 되겠느냐는데 그러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사례금이라며 PTA(학부모회의)의 이름으로 봉투를 내미셨다. '아니, 내가 돈을 벌다니!' 난감했지만 기쁘게 받기로 했다.

6개국에 대한 발표가 전부 끝난 후 아이들이 세계에 대해, 한국에 대해 좀 더 많이 이해하고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 혹은 '나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발상'이 이문화(異文化)간, 이국(異國)간 충돌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어릴 때부터 낯선 문화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되 존중할 줄 아는 자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세계 평화와 화합에 기여하는 재목들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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