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본 사촌형님

등록 2003.12.26 14:35수정 2003.12.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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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21일) 오후 어머니와 함께 '태안문예회관'을 찾았다. 내 유일한 조카딸 규빈이가 다니는 유치원이 문예회관 대공연장을 빌려 '재롱잔치'를 연 까닭이었다.


지난해 이맘때도 같은 행사가 있었다. 작년 12월 25일 도합 24명의 겨레붙이와 인연붙이 및 친지들에게 보낸 메일을 일년 후 같은 날에 내 홈피 '가족공동체' 방에 올려놓는 일을 하면서 그 메일을 일년만에 다시 한번 읽어보니 조카딸 규빈이 유치원의 재롱잔치에 관한 말이 들어 있었고, 또 그때 웹 상에 발표했던 관련 글을 첨부파일로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롱잔치는 다시 보아도 재미있었다. 지난해보다 내용도 더 알차고 진행도 매끄러운 것 같았다. 특히 내 조카딸 규빈이는 한 살을 더 먹은 탓인지 지난해보다 한결 깜찍하면서도 의젓해 보였다. 무대에 여러 번 나왔는데, 한 번도 실수하거나 뒤쳐지는 법 없이 매번 자기 몫을 충실히 잘 해 내었다.

더욱 기분 좋은 일은 규빈이의 그 모습을 아빠도 흐뭇한 표정으로 열심히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 쉬는 일요일이어서 집에 있게 된 동생은 난생 처음 태안문예회관 대공연장 자리에 앉아서 어린 딸의 재롱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과 유치원생 딸의 이런저런 학교·유치원 행사들에 그동안 한 번도 참석해보지 못한 동생이었다. 일단은 직업 탓이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싫어하는 성격 탓도 거기에는 없지 않을 터였다.

그런 탓에 조카들의 이런저런 일에 큰아버지인 내가 아빠 대신 참석하거나 돌보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카딸 유치원의 이번 행사에서는 뜻밖에도 동생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어린 딸의 유치원 시절 마지막 행사 모습을 동생이 볼 수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흐뭇한 표정으로 줄곧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더욱 즐거운 기분으로 한참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저만치 앞쪽, 무대와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사촌형님 내외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입장하신 어머니를 찾다보니 어머니와 가까이 앉아 있는 형님 내외분도 볼 수가 있었다. 그들 옆에는 며느리와 큰손자인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정흠이도 함께 있었다.


정흠이의 동생 성흠이가 유치원생인 까닭이었고, 작은 손자 성흠이의 재롱 모습을 보기 위해 형님 내외분이 가게문까지 닫고 와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 옆으로 가슴 한쪽이 아릿해지는 비감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여름 아빠를 잃은 어린 손자의 재롱 모습을 보는 것은 그들에게는 또 한가지 큰 슬픔일 터였다.

열 아홉 가지의 프로들 중에는 '아빠와 춤을'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15번째로 진행된 프로인데, 순서표에 '아빠 찬조'라는 말이 달려 있었다.

다섯 명의 아빠들이 각기 아들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왔다. 똑같은 복장이었다. 검은 긴 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은 그들은 모두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체크무늬 보자기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아들을 앞에 놓고 나란히 선 그들은 음악에 맞춰 아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연습을 많이 한 것 같았고, 아주 능숙한 동작들이었다.

한결같이 삼십대 초·중반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건강하고 활기가 넘쳐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지난해 여름 36세의 나이로 중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한 당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건장한 체구에서 늘 건강미가 넘치던 그가 술로 얻은 간경화를 무시한 바람에 그만…. 쾌남아였던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저들과 함께 저렇게 춤을 출 거야. 둘째 아들 성흠이를 앞에 세워놓고….

형님 내외분도, 며느리도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나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아빠 잃은 성흠이의 가엾은 재롱 모습, 성흠이의 재롱 모습을 볼 때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 너무도 일찍 홀로 되어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서른 세 살 며느리의 애처로운 모습….

괜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형님의 모습을 다시 보니, 형님이 손수건을 꺼내어 눈으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눈을 닦는 것인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콧물을 닦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로 가져가는 형님의 모습을 나는 뒤에서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유치원 재롱잔치가 끝나 헤어질 때 내 어머니께 인사하시는 형님의 모습은 확실히 그전 같지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아들을 앞세운 사촌형님의 올해 연세 66세. 18년 전 내 선친께서 세상을 뜨시던 때와 같은 연세다. 형님은 요즘 들어 좀더 수척해지신 모습이었다. 아들을 앞세운 후로 너무도 상심이 컸던 탓인지 두 번이나 호흡 곤란을 일으켜 병원 신세를 진 일도 있었다. 당뇨병도 가지고 있으니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다행히 평생 동안 즐겨온 술과 담배를 얼마 전에 끊고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지만 무릎 관절이 아파 걷는 운동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혈당 조절이 여의치 않으신 모양이다.

우리 혈족을 두루 살펴보아도 당뇨병 환자는 나와 형님뿐이다. 나는 형님이 당뇨병에 걸린 것은 오랫동안 낚시가게를 운영하면서 노상 납봉을 만지며 산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큰아들을 앞세운 상심 속에서도, 그리고 혈당 조절이 여의치 않은 당뇨병을 안고 사시면서도 형님은 두 어린 손자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시는 눈치다. "어린 손자들을 위해서라도 형님께서 오래 사셔야 합니다"라는 내 말에 "그려. 아우 말대로 꼭 그러야겠지"하며 결연한 표정을 지으시기도 했던 분이다.

형수님은 환갑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큰아들을 앞세운 슬픔을 서예로 달래며 그런 대로 활기 있게 생활하신다. 23일 저녁 성당에서 성탄맞이 오락 행사를 할 때도 행사에 참가하는 손자들을 보기 위해 성당으로 걸음을 하셨다. 자신은 불교 신자이지만 성당을 방문하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얼마 전에 당질댁은 평일미사에 남편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세상 떠난 당질을 위한 연미사는 그 동안 내가 챙겨왔다. 당질의 생일, 기일, 영명축일, 그리고 추석날과 설날의 합동위령미사 예물을 내가 준비하여 미사를 지내곤 했다. 그런데 보통 날에 당질댁이 연미사를 봉헌한 것을 알고 연유를 물어보았다.

간밤 꿈에 남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꿈이었느냐고 물으니 당질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간밤 꿈에 남편을 본 것에 연유하여 저녁에 아들들을 데리고 성당에 와서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당질댁이 갸륵하기 한량없었다.

오늘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이며 내 당질의 '영명 축일'이다. 지난해 8월 24일 대전성모병원에서 당질이 세상을 하직할 때 당질의 원에 따라 원목실 수녀님을 청해 대세를 주면서 내가 스테파노라는 영세명을 붙여 주었다.

어제 저녁에 당질댁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이 당질의 영명축일임을 알려 주고 위령미사를 봉헌할 계획을 말하니 당질댁은 오늘 아침미사에 참례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당질댁이 사는 아파트로 차를 가지고 가서 당질댁을 태우고 성당에 갈 수 있었다.

미사 후 당질댁을 다시 내 차에 태우고 아파트로 가서 당질댁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앞에 내려주니 당숙댁은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당질댁은 너무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은 슬픔을 잘 극복해 가면서 건강하고 활발하게 살고 있다. 여간 고맙지가 않다.

그런 당질댁보다, 그리고 형수님보다 나는 사촌형님이 더 안쓰럽고 걱정이 된다. 재롱잔치를 마친 작은 손자를 껴안고 녀석의 볼에 얼굴을 비비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아빠 없이 자라야 하는 어린 손자에 대한 연민이 형님 가슴에 가득한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아빠 없는 어린 손자들을 위해서라도 형님이 오래 사셔야 할 텐데…. 다시 한번 사촌형님을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늘에 기원을 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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