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과메기 잘 먹었습니다!"

포항에서 날아 온 택배에 담긴 정(情)

등록 2003.12.26 19:10수정 2003.12.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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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고등학교 총동창회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한 선배가 사이트에 사진 올리는 법을 모르겠다고 글을 올렸더군요. 이 선배는 저보다 무려 12회 위니 내년이면 오십이 됩니다. 선배의 열정이 아름다워 어줍지만 알고있는 한도에서 방법을 댓글로 달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정보를 보니 포항에 계시더군요. 먹거리에 관심이 많은 터라 '포항=과메기' 공식이 절로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댓글 말미에 과메기 생각에 입에 침이 괸다고 은근한 기대감으로 사족을 달았습니다.

이 선배의 동창회 홈페이지 사랑은 남달라 거의 하루종일 접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의 댓글이 오르자 불과 수분만에 감사의 답글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후배님 짱이다!" 단 한줄이 전부였습니다. 과메기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차갑게 식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섭섭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릿한 맛의 기억이 큰 식욕을 자극하진 않았으니까요. 또 집 주변에 과메기를 비롯해 물 회를 파는 곳이 있어 언제나 포항의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비이락일까요. 다음날 아침 한 경제지에 과메기 맛있게 먹는 법이 소개됐습니다. 사진과 맛깔스런 글이 침샘을 어지간히 자극하더군요.

"과메기를 제대로 먹는 방법은 김에 미역을 깔고 그 위에 초고추장을 듬뿍 묻힌 과메기와 파, 고추, 마늘 등을 얹은 뒤 한 입에 털어 넣는 것이다. 소주를 한 잔 하고 입가심으로 먹는 것보다는 과메기를 먼저 먹고 과메기의 기름기가 입에서 채 가시기 전에 소주를 들이키는 게 두 가지를 제대로 먹는 것이라는 게 어민들의 얘기. 과메기는 껍질을 벗겼을 때 은빛이 확연해야 하고 육질은 짙은 갈색에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아야 최상의 상태다."

마침 쉬는 날이라 집에 있으려니 과메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아내가 받아 온 것은 택배박스였습니다. "포항에서 왔네?" 아내의 외마디에 고여서 넘쳐흐르기 직전의 침을 수습(?)하고 포장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은빛 등을 가진 과메기. 보기만 해도 침이 괸다.
은빛 등을 가진 과메기. 보기만 해도 침이 괸다.유성호
과메기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죠. 그런데 박스를 열자 신문지 뭉치만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신문지가 무엇인가를 돌돌 말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풀자 은빛 찬란한 과메기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미역, 김, 쪽파, 마늘, 초장, 된장 등 신문에 나온 메뉴 그대로가 들어 있는 '과메기 세트'였습니다.

"오! 선배님!"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꼼꼼히 싼 과메기 두 세트가 눈앞에 펼쳐지자 아내도 덩달아 마른 목을 꿀꺽 삼켰습니다. 우선 한 세트를 풀어 아내와 시식을 했습니다. 원래 회를 좋아하는 아내는 5분의4가량을 독식했습니다. 저는 선배의 정(情)을 그리다 그만 몇 점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동기들이 앞다퉈 과메기를 먹고 있다.
동기들이 앞다퉈 과메기를 먹고 있다.유성호
나머지 한 세트는 마침 저녁에 열린 고등학교 동기회에 가지고 나갔습니다. 동기들은 별미라면서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했습니다. 과메기 한 세트가 눈깜짝 할 사이에 없어졌습니다. 선배의 후배사랑이 여러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선배님, 과메기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세트 더 부탁하면 염치 없을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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