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현판 통과해야 경기장 입장?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에 걸린 친일기업인 김연수 현판 '수당문'

등록 2003.12.31 15:28수정 2004.01.1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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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주덕진종합경기장 정문. 이 경기장에 들어서려면 친일파 김연수의 현판(중앙) 이 붙은 '수당문'을 통과해야 한다.

전주덕진종합경기장 정문. 이 경기장에 들어서려면 친일파 김연수의 현판(중앙) 이 붙은 '수당문'을 통과해야 한다. ⓒ 심규상


"… 우리 일본의 세계 신질서 건설상의 책무를 생각할 때 가장 비근하며 가장 실질적인 만주개척 계획에 대해서 우리 동포가 내선일체를 구현하면서 나아가서 협력하는 것은 이 시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연수가 1940년 9월 30일 만주국 명예총영사 자격으로 '만주 개척민의 밤'에 일어로 방송한 '만주개척민과 동아 신건설 참가' 연설 중에서)

a 김연수의 호(수당)를 따 새긴 현판 '수당문'

김연수의 호(수당)를 따 새긴 현판 '수당문' ⓒ 심규상

전주 덕진종합경기장(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든 정문격인 일주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주문 정면에 전북지역 대표적 친일파의 아호를 딴 현판이 내걸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秀堂門'(수당문). 이 현판은 지난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 때 당시 삼양사 회장으로 있던 김연수씨(金秊秀. 1896~1979. 전북 고부 출생)가 경기장 조성 성금을 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호(秀堂)를 따서 내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 덕진종합경기장은 이후 1980년 9월 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됐다. 그러나 당시 전북도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았다는 내용은 경기장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지난해 3.1절 하루전날인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대표 김희선 의원)'과 광복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명 가운데는 '수당문'의 당사자인 김연수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이에 앞서 김연수는 제헌국회에서 구성한 반민특위에 친일반민족행위로 구속기소된 바 있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기도 관선 도회의원,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 칙임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임전보국단 간부 등을 비롯해 학병권유 연설을 하는 등 뚜렷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 그러나 '범의(犯意)를 긍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는 '무죄판결은 그의 죄에 대한 면죄부 발급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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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국방헌금 2만원, 1938년 육해군에 10만원, 재지(在支) 교육기관에 10만원, 군사후원기금 3000원, 1941년 총력운동 3만원, 임전보국단 10만원, 1942년 비행기헌납기금 10만원, 일장기 새긴 접부채 2만개, 1943년 소년연성비 5만원….

이는 김연수가 일제의 전쟁기금으로 헌납한 내역 중 일부다. 자료에 따르면,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직후부터 1943년까지 7년 동안 헌금 총계만도 80만원을 상회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돈을 헌금한 것은 벌어들인 돈 자체가 일제권력과 기생해 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김연수는 형 김성수(동아일보 창간)의 투자를 기반으로 1922년 경성직뉴 전무와 경성방직 상무 겸 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25년부터는 두 회사의 경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김연수의 국방헌금은 그의 경성방직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첫 국방헌금을 낸 1937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당기순이익은 그가 마지막 헌금을 내기 직전(1941년)까지 이어진다.

고도성장의 원인은 전쟁산업에 대한 공헌 등 전쟁협력 행위로 요약된다. 실제 김연수는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항공공업회사 대표를 맡아 전쟁수행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이같은 공로로 1941년 1월 일본 천황으로부터 견수포장을 수여 받았다.

그의 친일행각은 비단 이같은 행태에서 그치지 않고 친일단체 간부나 친일매체 기고 등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1942년 1월 14일자)에 기고한 '일억일심'이라는 연두소감을 통해 그는 조선백성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또 "성전에 참여해 황국의 성은에 보답"할 것을 목표로 활동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권세대(日本勸世隊)'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유학생들에게 학병 출진을 권유하는 유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총독부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 1944년 1월 19일자에 '조선의 학도들, 빛나는 내일에 입대하라'는 글을 통해 "학병에 입대하여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43년 8월에는 징용제의 실시를 "2500만의 무상의 광영"이라고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밖에도 만주사변재무성채권, 대동아전쟁채권, 대동아전쟁 재무성 각종 채권, 국가방위 특별채권, 전쟁저축채권, 전시국가방위채권 등 각종 전쟁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을 직접 매입하거나 또는 일반인들에게 매입을 강요하는 등 노골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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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반민특위로 호송돼가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들. 가운데 흰두루막 입은 사람이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 그 뒤는 민족대표 33인 출신의 최린

반민특위로 호송돼가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들. 가운데 흰두루막 입은 사람이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 그 뒤는 민족대표 33인 출신의 최린


윤해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발간)에서 그를 '전쟁의 아들'로 칭하고 "그의 자본은 일제권력과 자본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융합'되어 있어 분리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며 "친일행위 뿐만 아니라 친일부역행위 차원에서 자본축적행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최재흔(59) 전북지부장은 "지역의 대표적 친일파가 버젓이 공공시설물 현판에 내걸려 있는 것은 전주시민의 수치이자 모순된 역사적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며 "민족정기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즉각 현판을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인철 (사)체육발전연구원장(75. 전주시 덕진구)은 "김연수씨는 경제인이고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체육인이기도 하다"며 "교토제국대학 재학시절인 1917년 야구선수로 활동하고 한국에 건너와 야구시합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경기장 건설을 흔쾌히 지원하고 야구선수로 활동한 체육인으로 봐야 한다"며 "다른 행적을 들어 현판을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편견에 다름 아니다"고 반박했다.

전주시청 사회체육과 관계자는 "수당문이 세워지게 된 경위는 물론 김연수의 친일행적 등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며 "철거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고려하거나 논의한 바 없다"고 말했다.

전북대 교정에는 58년째 '친일파 공적비'
[현장] 친일파 박기순과 일본인 미야자키 공적비

▲ 전북대 교내에 서 있는 '덕진운동장건설비'
ⓒ전북민족문제연구소
인근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앞 뜰에는 친일파 박기순과 일본인 미야자키의 공적을 기린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가 58년 째 서 있다.

이 비석에는 운동장건설에 기여한 박기순(朴基順) 등의 공적을 담은 '덕진운동장건설비'와 함께 '소화(昭和) 9년'(1934년)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연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 원문에는 한자로 당시 전주읍장인 '후지다니 사쿠지로' 명의로 이렇게 적혀있다.

"… 시내의 유지 궁기길조(宮崎吉造. 미야자키 기치조)씨가 일찍이 공익사업에 힘써 오던 터에 5천원을 쾌척하여 공사비로 충당하여 광장을 만들고 각종 도구를 설치하였다. 전 부경 박기순씨도 공익을 위하여 재산을 기증하여 왔으며 3천원도 희사하여 연못 둘레에 석축을 쌓고 다리를 설치하여 넓은 도로를 개설하였다. … 이에 비를 세워 기록함으로써 이들의 미적(美蹟)을 영원히 전하고 후손들이 깨닫고 그 뜻을 이어 받아 문화발전을 도모하고 자 한다."

한마디로 미야자키와 박기순의 공덕비인 셈이다.

그런데 박기순은 지난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광복회에 의해 친일파로 선정된 바 있다. 박기순은 1910년부터 1935년까지 한일합방 직후 전북 여산군수를 역임하고 전주 노공은행장, 중추원 참의, 전북도농회 부회장, 조선박람회 평의원, 조선농회 도상임위원 등 각종단체의 임원을 맡아 친일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이유로 박기순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목배와 공로패, 대례기념장 등을 받기도 했다.

지척을 사이에 두고 구 운동장엔 일본인의 손에 의해 박기순 공덕비가, 지금의 경기장엔 전북도청의 손에 의해 김연수 공적 현판(수당문)이 나란히 세워져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덕진운동장은 1949년 전북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그 부지가 학교에 넘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심규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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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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