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실패한 교육자입니다"

성공한 교육자의 조건은 무엇인가

등록 2004.01.05 09:13수정 2004.01.0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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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여교사 한 분이 학교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23년째 초등교사로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뜻한 바 있어 학교에 휴직원을 내고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갑자기 침통한 표정으로 생면부지인 저에게 이런 말을 불쑥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입시교육의 최대의 피해자입니다."

고3 수험생도 아니고 20년이 넘도록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온 교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처음에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최대의 피해자가 최대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교사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진한 고민이 묻어 있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그의 다음 말이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교직 경력 23년만에 깨달은 것은 제가 실패한 교육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교직을 지망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실력을 쌓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실력이란 시험점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점수였습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사가 되고 난 뒤에도 그는 교사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점수를 따야 했습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방학 때마다 연수를 신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교직 경력 23년에 연수 경력은 25년.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올 수 있는지 물었더니 두 해는 아예 휴직 처리를 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중에 함께 공부하던 한 동료 교사가 쓴 글을 읽고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적응아를 지도해 가는 과정을 적은 글인데 한 학생에 대한 교사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아주 감동적인 글이었어요. 사투리가 섞인 투박한 일상어들이 오히려 글을 빛내주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것이 글 솜씨의 차이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도 감동적인 글을 써보고 싶어서 글을 고쳐보기도 했는데 차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것은 사랑의 차이였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에겐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거든요. 그때서야 깨달은 거죠. 제가 실패한 교육자라는 것을."

그렇게 말을 이어가며 자신을 실패자로 몰아세우는 그의 침통한 표정에서 저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23년 동안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니던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와락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육의 실패는 실패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잘못된 교육에 대한 진단은 그럴듯하게 해도 그 속에 통절한 아픔이 없는 거예요. 아픔이 없으니 치유할 의지도 없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아파하고 계시잖아요.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휴가원도 내셨구요.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성공에 한 걸음 더 앞서 있는 거라구요."


새해 첫날, 저는 신임 안병영 교육부총리의 새해 신년사를 인터넷 신문 기사를 통해 접하면서 문득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 부총리의 신년사에서 우리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는 의미심장한 대목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었지요.

불행히도 그 동안 우리 교육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기보다는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이제껏 우리는 지나치게 대학입학과 같은 학생들의 선발 문제에 집착하면서, 정작 교육의 본질문제, 다시 말해서 사람을 바르게 키우는 일, 즉 도야(陶冶)에는 깊은 관심을 쏟지 못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실패에 대한 인정이 그 동안 입시교육을 부추기고, 학교와 학원의 역할과 기능의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보수 언론들마저 입버릇처럼 해온 말이라 마음에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향후 얼마간 우리 나라의 교육을 책임질 교육부의 수장으로서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고 '사람을 바르게 키우는 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만으로도 머리를 조아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육의 슬픈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 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비와 자율학습비 명목으로 걷어들인 돈을 부정 사용하거나 횡령한 사건인데, 이에 대해서 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전교조 소속 교사들을 학부형들이 성토하고 나선 것입니다. 학교의 부정에 대해서 교사들은 눈을 감으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지요.

저는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가 갈 데까지 가는구나 싶은 비감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육이 그 동안 '사람을 바르게 키우는 일'에 소홀히 해온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학교가 부정의 소굴이 되어도 자녀들의 성적만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교육의 왜곡이요, 실패입니다.

문제는 이런 교육의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도덕적, 혹은 합리적 사고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있습니다. 학벌사회의 구조 속에서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성의 균형을 잠시 잃어버린 학부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관료나 교육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새해 신년사가 아무런 고민도 아픔도 없이 관례상 쏟아내는 말의 성찬이 아니라면 이제 교육계의 수장이 되신 신임 부총리께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학교를 '사람을 바르게 키우는 일'과는 무관한 입시학원쯤으로 여기는 몰지각한 교육자들을 바르게 계도하거나 엄단하는 일일 것입니다.

진정한 자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방황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깨우쳐 주는 일입니다. 인간의 도덕성과 창의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국가 경쟁력 운운은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에게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출세를 위하여 오로지 점수를 따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교사보다는 학생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무장된 교사가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맑고 고유한 영혼과 생명의 가치를 지닌 위대한 미래의 꿈나무들입니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우주입니다. 점수와 서열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외국자본을 끌여들여 장사할 수 있는 상품은 더욱 아닙니다.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그들을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학교에 가두어 놓고 한낮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자 엄청난 국가적인 손실입니다. 분명 그것은 교육의 실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실패를 통절하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한 아이를 사랑으로 대해지 못했다는 한 여교사의 실패한 교육자로서의 통절한 인식, 그것만이 우리 교육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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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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