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섬에서는 꼴찌가 첫째 된다"

박철 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4.01.06 00:30수정 2004.01.0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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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철 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표지.

박철 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표지.

TBS 교통방송을 듣고 있으면 '거북이 캠페인'이 자주 나온다. 째각째각 초침이 지나가는 효과음 속에서 한 여자와 남자가 이런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물론 차량 운전에 관한 내용이다.

A: 느린 만큼 빨라집니다(여자가 아주 빠르게 말을 한다)
B: 예? 뭐라고요?(남자가 대답한다)
A: 느린 만큼 빨라집니다(처음보다는 약간 느리게, 그러나 여전히 빠르다)
B: 뭐라고 하는 거야?(혼잣말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다시 한번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A: 느 린 만 큼 빨 라 집 니 다(여자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한다)
B: "아, 느린 만큼 빨라집니다"였군요(이제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결국 천천히 말을 했기 때문에 빨리 알아들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끼어들지 않고 느긋하게 신호를 잘 지키면 결과적으로 운전자들 모두 '빨리 운행할 수 있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것이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박철 목사의 산문집 <느릿느릿 이야기>에는 느리게 사는 삶의 미학이 담겨져 있다. 그 삶의 미학이 '거북이 캠페인'처럼 일상 생활 속 '행동'에서의 느린 삶뿐 아니라 숨가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번쯤 뒤돌아보게 하는 '삶의 여유' 즉, 마음 속의 느린 삶을 되새겨 보게 만든다.

박 목사가 살고 있는 강화도 교동섬 주민들은 느림의 미학을 너무나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느릿느릿 이야기>에서 첫페이지를 여는 '교동섬에서는 꼴찌가 첫째 된다'에는 느림의 철학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필자가 애써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느림 철학'의 극치 또는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또 하나의 파격은 차를 배에 실을 때에는 먼저 온 순서대로 싣지만, 배에서 내릴 때에는 거꾸로 맨 나중에 실은 차부터 내린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꼴찌로 온 사람이 제일 먼저 내려간다. 세상에 이렇게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먼저 배에 실은 차가 나중에 내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차를 먼저 싣겠다고 차를 안쪽으로 대려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먼저 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차를 먼저 실었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다. 새치기한다고 핏대 올릴 필요도 없다.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아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이렇게 통쾌한 역설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꼴찌로 탄 차가 일등으로 내리고 일등으로 탄 차가 꼴찌로 내린다는 것에 아무도 불만이 없다.

-본문 중에서 -

a 느릿느릿 그러나 화려하게 선을 긋은 해넘이. 멀리서 바라보면 일몰 풍경에서 느림의 철학 그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느릿느릿 그러나 화려하게 선을 긋은 해넘이. 멀리서 바라보면 일몰 풍경에서 느림의 철학 그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윤태

'빨리빨리'의 성급함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도시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면 박 목사를 비롯한 교동섬 사람들은 '느릿느릿'의 느긋함이 '생활의 전부'인 듯하다. 물론 교동섬처럼 농촌과 서울에 사는 도시인들의 삶의 방식은 각기 다르다며 '빨리 빨리'와 '느릿느릿'이라는 이분법적인 상반논리를 적용한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급한 사람은 급한 대로, 여유 있는 사람은 느릿하게 각자 스타일에 맞춰, 그렇게 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한번 산문집 <느릿느릿 이야기>를 펼쳐 보라. 아무리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일단 이 책을 펼치면 느긋해진다. 쉽게 책을 접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나 만화처럼 그것에 몰두해, 즉 빠져들어 책장을 접어두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박철 목사의 표현 하나 하나에 느긋함이 배어 나온다. 때문에 읽다 보면 그 느긋함이 눈에서 마음으로 전이된다. 결코 느긋함이 아니면 이 책을 읽을 수 없고 설령 느긋하지 않더라도 '눈'으로 읽다보면 '마음'이 느긋해진다는 사실이다.

<느릿느릿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형이상학적인 언어구사도 없으며 단지 교동섬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미사여구도 없고 현학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소박'할 뿐이다. 이곳에는 농촌이 전면에 그려져 있고 자연이 뒷배경으로 덧칠해져 있으며 그 속에 추억도 스며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하느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친구 같은 아내, 엉덩이가 함지박 만하게 훌쩍 커버린 징그러운 두 아들 아딧줄과 넝쿨이,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천사같은 늦딸 은빈이 등이 등장하는 가족 이야기도 있다.

아들 이름이 아딧줄과 넝쿨이다. 아딧줄이라 하면 바람의 방향에 맞춰 돛을 다루는 데 쓰이는 줄을 말하며 넝쿨이는 식물의 '덩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뻗어 나가 다른 물건에 감기기도 하고 땅바닥에 퍼지기도 하는 식물의 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돛을 달고 천천히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배, 천천히 다른 물건을 감아 올라가 자신을 지탱하는 덩굴(넝쿨이), 바로 자녀들에게도 '느림의 철학'을 전수하기 위한 박철 목사의 열정이 담겨져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한편 이 산문집은 '느릿 느릿 이야기'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글의 성격에 따라 네 개의 큰 제목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 또한 형태만 다를 뿐이지 결국 '느릿한 삶'으로 귀결된다. 즉 어떤 내용,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박철 목사, 그의 글에서는 '삶의 느림 철학'이 한껏 스며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느릿느릿 이야기>. 출판사 나무생각.

덧붙이는 글 <느릿느릿 이야기>. 출판사 나무생각.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박철 지음,
나무생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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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통과 대화를 좋아하는 새롬이아빠 윤태(문)입니다. 현재 4차원 놀이터 관리소장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착한노예를 만드는 도덕교육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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