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생각
며칠 전에 오프라인 <느릿느릿이야기> 제4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제호와는 달리, 나는 이번에도 앉은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해치우고 말았다. 매번 그렇듯이 느릿느릿 속삭이고 있는 그 삶의 이야기들을 나는 빨리빨리 읽어버리고 만 것이다.
표지를 포함해서 꼭 100쪽이 되는 이 작은 소책자의 마지막 뒷장을 닫고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창문 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도 내 마음은 서녘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처럼 환했다.
<오마이뉴스>의 '사는 이야기'에서 <느릿느릿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혼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때론 박장대소를 하면서도, 나는 <느릿느릿이야기>를 읽고 나면 마음이 환했다. 아, 이런 삶도 있구나.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리고 내 삶도 그런 삶이 될 수 있고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나는 <오마이뉴스>의 뉴스게릴라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런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음에 나는 감사드린다.
하지만 내 자신 스스로는 그런 사람에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을까? 이 물음 앞에서는 나는 망설이게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아직 멀었구나'하는 부끄러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를 펼쳐들고 읽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운 사연들과 빛나는 사유들을 이번에는 정말 '느릿느릿' 읽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읽을 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행간이 보이고, 멋진 사진에 빼앗겼던 시선이 오롯이 문장에 가 박힌다. 아, 정말 느릿느릿 읽으니 좋구나!
2.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는 그 제목처럼 우리에게 '느릿느릿'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느릿느릿'은 말 그대로 조금 천천히 가자는 것이다. 가장 먼저 배에 실린 차가 가장 늦게 배에서 내리게 되는 것처럼, 세상에는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마을 교동의 선착장에서 이 책의 지은이 박철 목사는 이 통쾌한 역설을 몸소 체험했으며, 그래서 그는 차를 실어 나르는 교동의 배 이야기를 이 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느릿느릿'은 단순히 '파시스트적 속도'라고도 불리는 우리 삶의 무한질주에 대한 제동장치로서만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속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넘어서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우선 우리는 '느릿느릿' 가면서 우리의 시선을 세상이라는 공간을 향해 열어놓아야 한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기 발 아래만 쳐다보고 간다면 그건 그야말로 게으름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박철 목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강화도 교동, 그리고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에 주목한다.
신나는 아침방송으로 마을 주민들의 하루를 열어주는 지석리 이장과 불편한 몸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칠십이 넘은 노부부, 그리고 이른 봄 논바닥에 하루 종일 모를 새기는 아낙에 이르기까지 교동에 살고 있는 순박한 마을 주민들 하나하나가 모두 느릿느릿 사는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들의 느린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은 도시인들과는 달리 자연의 속도에 따라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느릿느릿 살고자 하는 박철 목사의 시선이 자연으로 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은 느릿느릿 살기를 꿈꾸는 자라면 반드시 시선을 두어야 할 또 하나의 공간이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눈 쌓인 신작로를 느릿느릿 걸어와 어느 틈에 마을 어귀에 봄꽃을 피워놓고,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비추는가 싶더니 어느새 들판에 여문 곡식을 풀어놓고 나무들마다 주렁주렁 과일들을 달아놓는다.
마을 근처의 산과 숲과 바다를 거닐며 박철 목사가 길어낸 깊고 그윽한 사유는 느릿느릿의 속도가 자연의 속도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의 속도가 오래된 추억 속의 시간 속으로 향하게 될 때,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배꼽을 잡게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눈물을 쏙 빼놓게 하는 구수한 옛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구제할 길 없는 건망증 때문에 아내를 오토바이 상회에 내려놓고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난리를 쳤다는 그의 추억담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웃었던가. 그러나 스스로는 '건망증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의 기억력은 너무나 또렷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한 교인이 빗속에 가져온 과수기에 감격하여 빗물에 다 식고 엎질러진 그 과수기 국물에 눈물과 콧물까지 섞어서 먹었다는 추억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한참을 훌쩍거리기도 했다. 아,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런 것이로구나.
이런 옛이야기 외에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들려주는 그의 유년시절의 추억담들은 일정부분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겹쳐지기도 하면서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느릿느릿'은 이처럼 우리가 이미 살아낸 시간 속을 천천히 거슬러 오르면서 잊혀진 옛날이야기에서 오늘을 살아나가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이끌어내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느릿느릿'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공간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바로 인간을 향할 때이다. 만나자마자 재빨리 판단하고 아니다 싶으면 쉽게 헤어지고 마는 현대사회의 표피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느릿느릿'은 천천히 그러나 깊이 있게 사람들을 사귈 것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그가 교동의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교인을 잃지 않는 데 신경 써야 하는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관계를 희망하는 '느릿느릿'의 실천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릿느릿한 인간관계의 실천을 그는 집안에서부터 한다. 아내와 함께 산에 올라 나물 뜯기 내기를 하면서 부부간의 사랑을 확인한다. 큰아들 아딧줄이 화장실에 갖다 놓은 <아빠를 팝니다>라는 책을 보고는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하며, 책벌레 넝쿨이를 위해서는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장만해주기도 한다.
얼마 전 포털 사이트 '다음'에 얼굴이 크게 나오는 바람에 이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늦둥이 은빈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어떤가. 정말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약이 오를 정도인데, 그는 '약 오르면 딸 하나 낳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라면서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러한 진실하고도 넉넉한 그의 태도는 전봇대와 같이 하찮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마당 한구석에 돋아낸 상수리 어린 싹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늘 세상 만물에 자신을 비추어 배움을 구하는 구도자로서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아름다운 산문들로 말하고 있는 '느릿느릿'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속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속에서 그 동안 잊고 있던 자연의 속도를 다시 발견해내고, 잠시 멈추어 서서 잊혀진 옛 추억들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를 길어 올리며, 자신부터 먼저 살피기 시작함으로써 남들과의 인간관계를 깊이 있게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삼간(三間)의 접점에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고서는 나는 확인되지 않는다"라고. '느릿느릿'은 바로 그 삼간의 접점에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그가 세운 표지판인 것이다.
그 표지판은 그 자신의 말로는 아직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겸손이다. 각박한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그 표지판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빛은 백열등처럼 눈부시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 켠 촛불처럼 따스하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를 느릿느릿 읽었다.
3.
지난 주 가족회의에서 오프라인 <느릿느릿이야기> 제4호에 실린 박철 목사의 글 '내 자신의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를 아내와 딸아이에게 읽어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자신의 수다스러움을 꼬집는 것으로 여기고 딸아이는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자신의 말들이 생각나서인지 움찔한다.
그러나 사실 그건, 아내와 딸아이보다는 내 자신에게 읽어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앞서고 몸은 따라가지 못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그래서 이번 주말 가족회의 때부터는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를 한 꼭지씩 읽어주려고 한다. 아내와 딸아이에게 아니라 나한테 스스로 들려주는 다짐 삼아서 말이다.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박철 지음,
나무생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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