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한 꽃 '철쭉'

내게로 다가온 꽃들(13)

등록 2004.01.07 05:57수정 2004.01.0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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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홍
영산홍이선희
하나의 꽃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몇 번이나 그 꽃과 눈을 마주쳤을까요? 카메라로 순간에 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성과 사랑의 눈맞춤이 있어야 예쁜 꽃 그림이 하나 완성될 것입니다.

영산홍을 그려서 보내주셨는데 그림은 예쁜데, 영산홍은 일본이 원산지인데다가 주로 화원에서 많이 취급을 하기에 제가 카메라에 담아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법으로 영산홍과 같은 진달래과의 철쭉을 소개해 드립니다.

흰산철쭉
흰산철쭉김민수
먼저 소개해 드리는 꽃은 일반적으로 보는 꽃 색깔과는 다른 흰 철쭉입니다. 흔하지 않기 때문에 더 눈에 잘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여름이라고 할 수 있는 5월, 진달래가 자리를 비켜줄 즈음이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진달래와 철쭉, 영산홍을 딱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진달래는 꽃이 피고 진 후에 이파리가 나오는데 철쭉은 이파리 사이사이로 꽃 몽우리를 잔뜩 품고 있다 화들짝 꽃을 피우곤 합니다. 영산홍은 진달래나 철쭉에 비해 꽃도 작지만 꽃을 아주 총총하게 맺고 있는 모양새가 다르죠. 그리고 이 세 가지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진달래'입니다. 그래서 진달래는 '참꽃'이라고도 하고, 철쭉은 '개꽃'이라고도 한답니다.

김민수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영산홍이 '첫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고, 진달래는 '사랑의 희열'이니 이 비슷한 꽃들, 진달래과의 꽃들은 모두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는가 봅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부질없는 것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파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달래과의 철쭉, 그가 사랑하고 부둥켜안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산철쭉-영실서 윗세오름 오르는 길에서
산철쭉-영실서 윗세오름 오르는 길에서김민수
철쭉과 관련되어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헌화가>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과 그의 부인 수로부인이 부임길을 가다 잠시 쉬고 있는데 수로부인이 눈을 들어 벼랑을 바라보니 타는 듯 붉은 철쭉이 피어있었답니다.

수로부인은 넋을 잃고 꽃을 바라봅니다. 너무 예쁜 꽃을 갖고 싶었지만 벼랑이 워낙 심해서 감히 꽃을 꺾어 바칠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벼랑의 꽃을 꺾어 바치며 노래를 읊조렸습니다.

붉디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 한다면
저 꽃을 바치겠나이다.



그 소를 끌던 노옹(老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전해지니 신선(神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민수
신선들의 정원, 한라산 영실기암에서 지난봄에 만난 철쭉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자잘한 키에 넘칠 듯한 꽃을 피웠고, 그 가지가지마다 서려있는 기품은 마치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하는 듯하고, 작은 꽃들마다 산허리를 감돌고 있는 구름이라도 담을 듯 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오름들의 행렬, 그리고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모를 바다와 지는 노을을, 사계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볼 때마다 온 몸으로 그 아름다움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드는 순간순간마다 한 송이씩 피어냈을 것만 같은 한라산의 산철쭉은 흔히 길가에 조경수로 심겨진 철쭉과는 달랐습니다.

철쭉-종달리해안가에서
철쭉-종달리해안가에서김민수
진달래는 먹을 수 있으니 '참꽃'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식물에는 '참'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만도 참깨, 참외, 참가사리, 참나물, 참죽순, 참취가 있네요. 철쭉은 먹지 못한다 하여 '개꽃'이라고 하는데 옛날 어른들이 혹시라도 아이들이 이 꽃을 먹을까하여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겁을 주었습니다.

지역마다 다르게 구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제가 철쭉에 관해 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철쭉을 먹으면 피가 말라죽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진달래로 착각을 하고 철쭉을 따서 한 송이 먹었습니다. 한 송이야 어찌 되겠습니까마는 어린 마음에 '피가 말라죽으면 어쩌나'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김민수
진달래, 영산홍, 철쭉은 조금씩 시기는 다르지만 봄에 피어나는 꽃입니다. 대략 이 꽃들이 한창일 때는 3월에서 6월 사이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 사이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역사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제주 4.3과 미완의 혁명 4.19, 그리고 80년 오월의 광주를 넘어서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들이 들어있습니다. 어쩌면 철쭉은 이 모든 역사들을 한 몸에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철쭉은 아마도 우리 민중들의 삶을 사랑했나봅니다. 그들이 즐거워할 때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었던 꽃,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했던 꽃, 그래서 '사랑의 즐거움'이라는 꽃말을 얻었나 봅니다.

들에 이름을 얻지 못한 꽃들까지도 이 땅의 민중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함께 고난을 당하고, 민중들이 피를 흘릴 때 그 피를 먹고 자랐을 것입니다. 민중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했을 꽃들,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우리의 꽃들인데 또한 우리들은 그들에게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제주 12번 국도 도로변에 조성된 철쭉 중에서.
제주 12번 국도 도로변에 조성된 철쭉 중에서.김민수
오세영 시인은 4.19혁명 29주기를 맞으며 철쭉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소리 없는 함성은 죽어서
꽃이 되나 보다.
파아랗게 강그라지면서
외치는 입과 입,
꽃은 시각(視覺)으로 말하지만
그의 언어는 미각(味覺)이다.
발포!
시위를 진압하고 돌아와
술잔에 꽃잎을 띄우는
독재자여,
너에겐 광기(狂氣)를 달래는 술조차
폭력이구나,
그러나 너는 모른다.
확고한 신념은 항상
대지에 박고 있는 뿌리인 것을,
꺾어도 꺾어도 피어나는
빛 고운 우리 나라 4월 철쭉꽃

덧붙이는 글 |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240,000원

덧붙이는 글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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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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