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엽서' 받아보셨나요?

일본의 연하장(年賀狀) 풍습

등록 2004.01.07 13:02수정 2004.01.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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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감기와 씨름하고 있는 사이 여지없이 새해 아침은 밝았습니다. 그나마 긴 다툼을 끝내고 회복기에 들어 새해를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덕분에 송구영신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갔습니다. ‘갈테면 가고, 올테면 오라지’ 솔직히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365일의 다른 날들과 도대체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면서요.


아무리 양력설을 쇠는 일본에 살고 있다 하여도 음력설을 쇠는 풍습에 젖어 살아 온 저로서는 양력 새해라 하여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겠더군요.

밖에서는 108번 친다는 제야의 종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는데도, 새해 첫 소원을 빌러 신사(神社)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갓 시작된 새해의 새벽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데도, 나와는 상관없는 별세계의 일인양 전 무관심하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새해 아침, 느지막이 식사를 끝내고 혹시나 하여 1층의 우체통에 가보았습니다. ‘누군가 내게도 연하장을 보내주었을까? 약 40억장 이상이 오고 간다는데 그 속에 내 것도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요. 사실 전 한 통도 보내질 않았으니 정말 얌체 같은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 것들 틈에 제 것도 끼어 있네요. 어떻게 주소를 알았을까? 제가 요리강습을 했던 모임의 회원 두 명에게서 연하장이 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교토에 살 때 이웃에 살았던 분들, 딸아이가 다녔던 보육원 원장님, 같은 반이었던 어떤 사내아이의 엄마, 그리고 교토에서 다녔던 일본어 학원의 선생님께서도 보내왔습니다. 딸아이에게도 유치원 친구로부터 연하장이 왔고요.

아이들의 사진을 넣어 만든 것, 도장처럼 새겨서 찍은 것, 그림이 인쇄된 엽서를 이용한 것, 연하장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 직접 손으로 그린 것 등 다양합니다. 원숭이 해를 맞아 원숭이 그림이나 ‘申(신)’자가 들어 간 게 공통점이네요. 새해 인사와 간단히 소식을 전하거나 묻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a 그리운 사람들에게서 온 연하장들

그리운 사람들에게서 온 연하장들 ⓒ 장영미


어떤 것은 지난 해 자신들의 업적과 성과, 새해 계획과 포부를 밝힌 것도 있고, 자신의 근황을 빼곡이 적어 보낸 것도 있습니다. 저희 집에 잘못 배달된 한 엽서엔 부부의 근황을 나누어 적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번쩍이는 업적 아래에 전업주부인 아내의 근황과 포부가 적혀있는데 한참 웃었습니다. 홈페이지 만들기에 도전했는데 지지부진했다는 얘기, 새해엔 다시 열심히 해보겠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였습니다. 제 얘기인 듯싶더군요.


정말 반갑고 그리운 이들에게서 연하장이 왔습니다. 최근에 사귀게 된 사람들은 그렇다해도, 벌써 헤어진지 3년이 넘었는데 잊지 않고 연하장을 보내주는 분들에겐 뭐라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교토에서 지낼 때도 여러모로 신세를 진 쪽은 오히려 저인데, 그런 저는 모른 척 지나가려한데 반해 그 분들은 습관적으로든, 타성에 젖어서든, 아니면 정말 정(情)을 나누려는 것이든, 어쨌든 제게 정성을 쏟아주니 고마울 수밖에요.

교토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그려집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겠지요? 올해엔 꼭 교토에 놀러오라고들 하시는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에 반나절 동안 교토 시내를 돌아보고 온 적이 있거든요.

너무 갑작스럽고, 짧은 일정이라 옛날에 살던 곳은 아쉽게도 들러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못 가는 대신에 이쪽으로 놀러 오시라고 답을 해야겠습니다.

미리 보내지 못했으니 답장이라도 써야겠기에 엽서를 사다가 딸아이의 힘을 빌려 직접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한창 글씨를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아께마시떼 오메데또고자이마스(새해 축하인사)’라고 큼지막한 글씨로 써주었고 그림에 색칠도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인사말을 쓰고 주소를 써서 간단히 연하엽서를 만들었습니다.

a 딸아이와 힘을 합쳐 만든 답장 연하장들

딸아이와 힘을 합쳐 만든 답장 연하장들 ⓒ 장영미


a 6살난 딸아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연하장들 (공룡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공룡마을도 그렸답니다)

6살난 딸아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연하장들 (공룡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공룡마을도 그렸답니다) ⓒ 장영미


우체통에 집어넣는 역할은 딸아이의 몫이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입니다.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받는 분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져서 일까요?

관습이나 풍습, 집착하고 얽매이다 보면 그것처럼 귀찮고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인 저는 일본의 그것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고, 덕분에 생활 속에 박힌 깨소금을 씹는 양 그것들을 고소하고 향긋하게 느끼면서 삽니다.

올해의 연하장이 그랬습니다. 관습을 무시한 채 아무 거리낌없이 연하장을 보내지 않는 (보낼만한 곳도 없었지만) 자유를 누렸고, 뜻하지 않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답장 형태였지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연하장을 주고받는 일이 일본만의 고유 풍습인 것도 아닌데, 일본에선 일본식으로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특이한 것 같습니다. 카드가 아닌 관제엽서를 사용한다는 게 그렇고, 새해 아침에 일제히 배달해 주는 게 그렇습니다. 엽서를 꾸미는 각종 소프트웨어와 인쇄사업 등 관련 분야의 발달이 그렇습니다.

사회적 지위의 척도로써의 역할도 한다니 그렇게 얽히고 설켜서 귀찮고 번거로워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선 더디기만한 일본의 개혁작업을 떠올리게도 하고요.

일본에서의 연하장 풍습은 멀리 떨어져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소식을 나누고, 자신을 어필할 기회로 삼거나 관계를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는 한 방법임엔 틀림없어 보입니다.

제가 더욱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관제엽서의 규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미적 감각과 개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한번도 규격을 벗어난 연하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너무도 일본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1월 18일엔 관제엽서에 새겨진 복권 추첨이 있습니다. 제가 받은 연하엽서들 중에서도 당첨되는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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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과 겨울, 엽서로 인사하는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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