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일요일을 산산조각낸 '돈도야끼'

작은 설날(小正月)인 정월 대보름, 아이들을 위한 불놀이

등록 2004.01.12 17:59수정 2004.01.1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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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아침 9시, 바로 코 앞에 있는 자치회의 확성기를 통해 일본 동요와 민요,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로서 우리의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은 산산조각이 났다. 딸아이는 제가 아는 노래가 나온다고 신이 나서 따라 불렀지만, 난 열린 창문을 닫으며 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문득 얼마 전에 자치회에서 돌린 회람이 생각났다. 1월 11일에 마을 축제를 연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던 것이다.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서 열리는 축제인 만큼 꼭 가보고 싶어졌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치우고, 씻고, 딸아이를 준비시켜 자치회관 옆의 공터로 갔다.

평소엔 마을 노인분들이 모여 게이트 볼을 하기도 하고, 근처의 아이들이 와서 놀기도 하고, 우리 아이가 자전거 타기를 배우기도 하고 공놀이를 하며 놀았던 그 공터였다. 그곳에서 축제 준비를 마친 마을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과를 드시고 계셨고, 한쪽 옆에서는 아이들 몇몇이 모여 일본 북인 다이꼬(太鼓)를 두드리며 놀고 있었다. 아직 축제가 시작되진 않은 것 같았다.

a 돈도야끼 축제의 준비가 끝났다.

돈도야끼 축제의 준비가 끝났다. ⓒ 장영미

공터에 꾸며놓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거창한 축제가 될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라 너무 신기하고 예쁘기도 해서 곳곳을 돌며 사진을 찍었다. 회람을 읽을 때도 분명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던지라 어떤 축제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어르신들께 다가가 여쭈었다. 처음 뵙는 자치회장님께서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오늘 여는 축제는 ‘돈도야끼(どんど焼き)’라는 것인데 아이들이 주체가 되는 축제이다. 요즘은 양력으로 행하지만 예전엔 음력 1월 14일 밤에 행했다. 넓은 공터에 길고 굵은 대나무(御神木)를 세우고, 아이들이 동네를 돌며 모아온 오쇼가쯔(お正月; 일본의 설날) 장식품들, 예를 들면 가도마쯔(門松), 시메나와(しめ縄), 다루마(達磨) 등의 물건들과 나뭇가지 등을 쌓아 ‘도소진고야(道祖神小屋)’란 것을 만들어 불태우는 것이다.

‘도소신(道祖神)’은 원래 여행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마을 어귀나 교차로 같은 곳에 커다랗고 둥근 돌을 세우고 거기에 도소신을 모셨다는데 도소신은 어린이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소신이 돈도야끼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 불길 속에 가끼조메(書初め; 신춘휘호) 종이를 태워 불길이 높이 일면 글씨를 잘 쓰게 된다고 하며, 그 불씨에 찰떡을 구워 먹으면 1년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 등 무병식재(無病息災)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종의 액막이 행사이다.

이곳 자치회에서는 농촌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런 풍습을 아이들에게 경험케하려고,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의 조언과 자료들을 찾아 재현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맥이 끊겼던 '돈도야끼 축제'는 올해로 9회째를 맞게 되었다.



본격적인 축제는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도 집에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시간에 맞춰 다시 나왔다. 원래는 밤에 해야하는데 여러가지 사정상 밝을 때 하게 되었단다. 인근 소방서에서 소방차와 소방대원 3명이 파견되어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오전과는 달리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공터의 중앙에 ‘도소진고야’가 마련되었고 높은 대나무 끝에 붉은 다루마가 매달려 있었다. 오곡풍양(五穀豊穣), 무병식재(無病息栽) 등이 적힌 종이와 함께 집에서 가져 온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a 돈도야끼가 행해질 도소진고야(道祖神小屋) - 무병식재와 오곡풍양 등을 기원하고, 정월에 장식으로 썼던 물건들을 쌓아 태운다.

돈도야끼가 행해질 도소진고야(道祖神小屋) - 무병식재와 오곡풍양 등을 기원하고, 정월에 장식으로 썼던 물건들을 쌓아 태운다. ⓒ 장영미


대나무를 길게 쪼게 거기에 형형색색의 종이를 붙여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지게 만든 높은 장식물이 있었는데 신에게 돈도야끼 축제를 하는 장소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한다. 자치회장님은 이를 '고신보꾸(御神木)’라고 부르셨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축제가 끝나면 30cm 정도로 잘라 자치회의 회원들에게 나눠준다. 잘 가지고 있다가 내년의 돈도야끼 할 때 불태운다.

a 고신보꾸(御神木)과 찰떡 나무

고신보꾸(御神木)과 찰떡 나무 ⓒ 장영미


그 옆에는 가지가 많은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흰색, 분홍색, 연두색, 노란색, 붉은색을 들여 빚은 둥근 찰떡이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화꽃이 연상되었다. 이것도 축제가 끝난 후 가지를 꺾어 집으로 가져가 먹는다.

한쪽에는 얇고 길게 자른 대나무 끝에 흰색과 분홍색 찰떡을 꽂아 놓은 것이 가득 놓여 있었다. 돈도야끼가 끝나갈 무렵 그 불씨에 구워 먹을 찰떡이다.

a 찰떡 나무

찰떡 나무 ⓒ 장영미


a 돈도야끼를 한 불씨에 구워 먹을 찰떡 - 이걸 먹으면 1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돈도야끼를 한 불씨에 구워 먹을 찰떡 - 이걸 먹으면 1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 장영미


그 공터의 한켠에는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데 그곳에 우리네의 성황당 같이 새끼줄을 매고 앞쪽에 술을 따라 놓은 곳이 있었다. 오늘의 축제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임시로 장식해 놓은 것이다. 평상시엔 이 나무에 아이들이 올라가 논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 아이가 올라가 주변을 내려다보며 햇볕을 쐬고 있었다.

a 일본식 성황당과 햇볕 쬐는 아이

일본식 성황당과 햇볕 쬐는 아이 ⓒ 장영미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라져가는 풍습인 만큼 돈도야끼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후 자치회장과 몇몇 분이 도소진고야 주변을 깨끗이 하는 의미로 새술과 소금, 쌀알을 주변에 뿌렸다.

이윽고 자치회장, 어린이 대표, 현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남녀 대표에 의해 도소진고야에 불이 붙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차츰 붉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라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소방대원 3명이 불길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이어서 아이들이 ‘오미코시(御靈輿)’라는 작은 가마를 메고 불길 주변을 두 바퀴 돌았다. 일본의 축제 마다 특색있는 오미코시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이들이 멜 수 있도록 작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옛날엔 이것을 메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한다. 오미코시가 끝난 후 아이들은 과자와 귤 등의 선물을 한아름 받았다.

a 아이들의 수호신이라는 도소신의 집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아이들의 수호신이라는 도소신의 집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 장영미


a 아이들이 '오미코시'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오미코시'를 하고 있다. ⓒ 장영미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마자께(甘酒)’라는 술찌끼로 만든 아주 단 음료를 마셨다. 우리네 식혜처럼 보이는데 훨씬 걸죽하고, 따뜻하고, 10배 정도는 달았다. 너무 달아서 목이 칼칼해질 정도였다. 아마자께는 아이들을 축하하는 행사 때 주로 마시는 음료이다.

a 돈도야끼 축제 전경

돈도야끼 축제 전경 ⓒ 장영미


불길이 사그러들자 대나무 꼬챙이에 꿴 찰떡을 불씨 위에 올려 구웠다. 이 찰떡을 먹으면 일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단다. 일본의 다른 찰떡과는 달리 아무 맛도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소금도 넣지 않은 모양으로 정말 무미(無味)그 자체였다.

a 대나무에 꿴 찰떡 굽기

대나무에 꿴 찰떡 굽기 ⓒ 장영미


주인공인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어울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북을 쳐대고, 나무에 오르락거리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찰떡을 어느 정도 먹은 사람들은 귤을 불씨에 구워 먹기도 하고, 매화나무처럼 생긴 곳에서 찰떡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를 꺾어 하나 둘 씩 사라져갔다. 나도 그것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이 무미의 찰떡은 다음 날 얇게 썰어서 떡라면을 끓여 먹었다.

돈도야끼는 지금은 이렇게 재현해서 보여줘야 하는 것이 되었지만, 농사를 짓던 옛날에는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한다. 양력 대보름에 행하는 게 좀 어색했지만 돈도야끼를 보면서 한국의 정월 대보름 풍습인 ‘쥐불놀이’가 떠올랐다. 의미는 다르지만 ‘아이들이 불놀이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지신밟기’처럼 ‘동네의 집집을 돈다’는 점이 비슷하다.

한국은 아직 설도 쇠지 않았는데 대보름 얘기를 하자니 어색하기만 하다. 일본은 작은 설날(小正月)이라는 대보름도 지났고, 이제야 완전히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올해의 다짐을 미루고 있다. 진짜 새해의 둥근 해를 보며, 진짜 대보름의 둥근 달을 보며 하겠노라고 아직껏 꼭꼭 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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