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도 그리던 엄마를 찾아간 아동 작가

[현장]故 정채봉 선생님 3주기 추모문학콘서트

등록 2004.01.13 12:34수정 2004.01.1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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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2일 대학로 샘터 소극장에서 고 정채봉 추모문학 콘서트가 열렸다. 고 정채봉씨의 딸 정리태씨가 고인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12일 대학로 샘터 소극장에서 고 정채봉 추모문학 콘서트가 열렸다. 고 정채봉씨의 딸 정리태씨가 고인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 김진석

a 사회자 김갑수씨와 초청 손님인 고 정채봉씨의 지인 김병규 동화작가.

사회자 김갑수씨와 초청 손님인 고 정채봉씨의 지인 김병규 동화작가. ⓒ 김진석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故 정채봉 선생님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中



2001년 1월 9일. 그가 떠난 날은 눈이 무던히도 많이 오는 날이었다.그리고 2004년 1월 12일. 흩날리는 시린 눈발을 밟고 故 정채봉 선생님의 온기를 찾아 사람들이 대학로로 모여들었다.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혹은 성인동화의 시초가 된 故 정채봉 선생님의 3주기 추모문학콘서트가 저녁 7시 30분 대학로 샘터 파랑새 소극장에서 열렸다.

한국민족음악인협회와 시민방송 RTV가 주최한 이번 콘서트엔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녀노소 구분없이 100여명이 찾아와 고인에 관한 '기억'을 나눴다. 정 선생님이 남긴 시와 동화를 노래하는 동안 언제나 그렇듯 사진 속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한없이 보내고 있었다.

한국민족음악인협회(이하 민음협)는 민족 음악 어법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다양한 창작 활동으로 건전한 음악 문화를 정착하고자 공연 및 음반제작, 정책연구 등을 벌이는 곳이다.

콘서트에 참석한 지인들도 다양했다. 이번 콘서트의 연출을 맡은 가수이자 ‘이등병의 편지’ 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 등을 만든 작곡가 김현성씨, 동화작가 김병규씨, 소리꾼 김수미씨, 고인의 딸 정리태씨 등이 함께 호흡을 맞췄다.


콘서트의 처음과 끝은 고인의 시를 노래하는 것으로 장식했다. 정 선생님의 ‘글’ 은 판소리, 아동극, 음악 독후감 등 여러 형식으로 변주됐고 객석에선 '신선하다' 는 반응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고인과 각별했던 동화작가 김병규씨는 정 선생님의 얘기를 짧게 들려주었고, 콘서트 중간엔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고인의 시를 관객들이 낭독하는 즉석 이벤트가 열리기도 하였다.


a 고 정채봉씨의 작품 중 '흰 구름이 들려준 이야기' 를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박지수, 박영서 어린이

고 정채봉씨의 작품 중 '흰 구름이 들려준 이야기' 를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박지수, 박영서 어린이 ⓒ 김진석

a 가수 홍순관씨는 고인의 살아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뒤로 고 정채봉씨의 미소

가수 홍순관씨는 고인의 살아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뒤로 고 정채봉씨의 미소 ⓒ 김진석



“그 해맑던 모습을 추억하며... "

서로의 숨소리가 부딪치는 소극장 안은 동심을 그리는 사람의 온기로 가득 메워졌다. 동화작가 김병규씨는 “고인의 문학 세계엔 일찍 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림움과 애잔한 정이 관통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선생이 오세암에 갔을 때는 별 소득이 없었대요. 근데 막상 집에 돌아와 오세암에서 녹음된 새소리를 들어보니 미처 자연속에선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지더래요. 그래서 새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번역하면 어떨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그 오세암이죠.”

작년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큰 호평을 받았던 오세암의 탄생 설화가 들려졌다. 이어 김씨는 출간하지 못한 ‘저산너머’(김수한 추기경의 어린 시절 얘기)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1차 수술을 받은 고인에게 눈물을 보였던 작은 일화도 털어놨다.

그는 고인을 진정한 동화 작가의 본보기라고 회고하며, 자신의 일상을 담은 편지글로 고인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김씨의 기억을 전해들은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시다가도 무대 앞에 걸린 고인의 현수막 사진을 보고는 또 다시 눈을 맞추곤 했다.

고인의 시를 낭독하는 즉석 이벤트에 참석했던 엄민석(20·대학생) 군은 비록 전공은 화학과를 지원했어도 글쓰기를 좋아한다며 정 선생님을 닮고 싶다 했다. 특히, 그는 상처와 고난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웃던 고인의 모습이 가장 닮고 싶다며, 정 선생님을 모르는 분들에게 고인의 작품을 권하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뒤를 잇는 딸 정리태씨는 “눈이 많이 와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지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 며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번 콘서트를 연출한 김현성씨는 “고인의 마음이 이미 동심으로 채워졌기에 그리 많은 동화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며 “그저 손으로 쓰는 동화는 몇 작품 출간하다가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할 것” 이라 말했다.

이어 김씨는 '문학성' 과 '천진성' 을 두루 겸비한 것이 고인 작품의 특징이라며, 그도 정 선생님의 맑은 모습을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꼽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마지막까지도 고인의 동시 '그땐 왜 몰랐을까' 가 훈훈한 소극장에 메아리를 남겼다. 故 정채봉 선생님과의 기억들을 함께 추억했던 겨울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한편, 지난 9일 기일엔 고인의 잠언집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샘터발행) 가 출간됐고,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소설가 박완서, 조정래씨 등이 참가해 추모 모임을 가졌다.

대한민국 동화작가의 거목 故정채봉 선생은...

1946년 전남 바닷가에서 태어난 정채봉은 여동생과 그를 낳았던 스무 살의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또한 일본으로 이주해버려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그리움과 애증의 대상이 된 부모님 덕에 그는 내성적이고 심약한 아이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없었던 유년 시절의 외로움은 정씨가 동심의 행복과 평화를 노래하는 동화작가가 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광양농고 시절 그는 '온실관리' 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정씨에겐 농업학교의 교과목이 체질에 맞지 않았고, 급기야 온실의 연탄난로를 꺼 관상식물이 얼어 죽게 만드는 '사고'를 쳤다.

그 후 학교 도서실의 당번 일을 맞게 되면서 자연스레 문학에 빠져 들었고 재수 끝에 동국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3학년 때인 1973년 정씨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꽃다발'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1978 년 <샘터> 에 들어가 한 달에 3천 통이 넘는 독자들의 편지를 일일이 읽는 일부터 시작해 <샘터>의 발행 부수를 55만 부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 는 그에게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진실과 정의에 깊이 회의하던 정씨는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에 귀의했다. 곧 띄엄띄엄 발표했던 동화를 모아 <물에서 나온 새> 를 간행했고, 이 작품집이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한다.

신춘문예 당선 후 10년 만에 다시 창작의 길로 돌아오게 된 그는 두 번째 작품 <오세암>으로 새싹 문학상을 받았다. 또 그는 <샘터>에 '생각하는 동화' 라는 독특한 분야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 '성인동화' 의 시초가 됐다.

< 멀리가는 향기>, <내 가슴 속 램프> 등 모두 일곱 권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와 함께 성장 소설 <초승달과 밤배>로 정씨는 대한민국 동화작가 거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던 1998년 말. 동화작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활동하던 정씨에게 간암 선고가 내려졌다.

투병 중에도 그는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고 자신이 겪은 고통과 삶에 대한 의지를 담아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출판한다. 또 환경문제를 동화에 끌어 들여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로 2000년 5월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하고 2001년 결국 간암으로 작고한다. / 김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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