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빅토리아의 시계는 느리다

이정은 기자의 캐나다 연수기 (1)

등록 2004.01.13 12:08수정 2004.01.1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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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보았습니다. 제가 있는 이 곳은 캐나다 서부의 빅토리아라는 섬입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6주라는 영어 연수의 기회를 제공받고 이 곳에 도착한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군요.

도착하고 나흘 동안은 본격적인 수업 없이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지내면서 현지 적응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혼자서 버스 타는 법, 근처 쇼핑몰에는 어떻게 가는지, 길을 건널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익혔지요.


이 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익히는 과정에서 저는 몇 가지 한국과의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다지 큰 차이점은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전형적으로 영화에서나 보던 외국인들의 현실들이 바로 생활 속으로 다가오면서 저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들의 실상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a 보행자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 버튼 아래에는 'ECONO LITE'라고 쓰여있다.

보행자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 버튼 아래에는 'ECONO LITE'라고 쓰여있다. ⓒ 이정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신호등이었습니다. 이 곳의 신호등은 한국의 그것과는 달리 보행자가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신호등에 설치된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러면 잠시 후 신호가 바뀌면서 보행자는 길을 건널 수가 있지요. 이 신호등에는 "ECONO LITE"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신호등은 보행자가 없어도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 도로의 차가 의무적으로 멈춰야 하는 한국의 신호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반드시 보행자가 있고 버튼을 눌러야만 차가 서는, 말 그대로 '경제적인 신호등'인 셈이지요. 서울처럼 많은 사람이 수시로 북적이는 큰 도시라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같은 우리 나라의 중소 도시에서는 적용해 보아도 좋을 듯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곳 사람들은 조깅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결코 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빅토리아의 웬만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거리에서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이 일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 곳 빅토리아 사람들은 여유를 갖고 생활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되돌아 봅니다. 남보다 버스에 늦게 탈까 봐, 주문한 음식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올까 봐 우리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고 시계를 보지요. 그래서 마치 한국의 시계는 이곳보다 몇 배 더 빨리 돌아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마치 한국이 빅토리아보다 17시간 빠른 것처럼 말이죠.


이 곳 빅토리아에는 밤이 일찍 찾아옵니다. 해가 일찍 지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사람들은 10시면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한창 '장금이'를 만나고 있을 시간에 말입니다. 이 곳 사람들보다 몇 배 더 빠르게 사는 한국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도 이들보다 늦게 마감합니다.

아직은 저에게 이 곳의 모든 것들이 낯설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느긋하게 살면서도 하루를 일찍 마감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빅토리아 사람들을 보니 늘 바쁘게 살면서도 하루 서너시간 밖에 자지 못했던 저의 한국 생활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다음 기사에는 미국의 그늘에 가려진 캐나다인들의 열등감을 재치있게 날려버린 한 광고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저도 빅토리아에 도착한 이후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 생활 시계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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