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느리게 오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 <시가 내게로 왔다>

등록 2004.01.13 13:12수정 2004.01.1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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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가 내게로 왔다>
책 <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여기 모인 시들은, 내가 문학을 공부하면서 읽었던 시인들의 시 중에서 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빛나고 있는 시들이다. (중략) 소설은 한 번 읽으면 다시 읽기가 어렵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맛이 새롭게 생겨난다.

시를 읽는 사람의 '지금'의 감정과 밀접하게 작용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의 감동은 멀리서 느리게 오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그래서 시다."



소설처럼 긴 글읽기를 귀찮아하는 이들에게 감수성을 촉촉이 적셔 줄만한 기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시를 읽는 일일 것이다. 회사의 사보나 잡지책의 한 페이지에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 시를 읽고 따뜻함을 느끼면 그 하루는 행복할 수 있다.

김용택이 이 책을 통해 전하는 시의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읽는 사람의 감정에 다가와 삶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 독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을 때에 시는 비로소 그 빛과 가치를 발휘한다.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는 다른 책들의 경우 시나 시인에 대한 해설이 길게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시집은 시만큼이나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단상이 붙어 있을 뿐이다.

김용택은 길고 복잡한 시의 해설보다 간략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시의 상징적 의미를 더해 준다. 각 시를 창작한 시인에 대해서도 길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삶 중 한 부분을 보여줌으로써 시와 어우러진 시인의 생애를 보여 주는 것이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의 <겨울밤> 전문


"그의 시를 읽으면 외양간 처마 밑에 걸어둔 마른 시래기에 싸락눈 들이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다 떠난 적막한 고향 마을 밤 깊도록 잠 못 들고 계실 어머님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눈이라도 오면 문 열고 나가 '뭔놈의 눈이 이리 밤새 퍼붓는다냐'시며 고무신에 쌓인 눈을 터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향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묘사하기 위해 마늘밭에 쌓이는 눈과 추녀 밑의 달빛을 묘사하는 감수성이 돋보이는 박용래의 시. 그의 시를 읽으면서 어머니의 기침 소리를 떠올리는 김용택의 느낌 또한 시인과 같은 감각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각 시인들의 독창적 표현은 김용택의 해설과 어우러져 묘한 이중창의 울림을 토해 낸다. 시와 그 해설이 서로 다르면서도 조화롭게 평행선을 이루어 두 가지 의미의 공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이라는 서로 다른 형식, 시를 쓴 작가와 그것을 해설하는 평론가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해설은 나란히 존재한다. 각 작품과 해설에서 울려 퍼지는 두 가지 소리의 조화를 느낄 때에 이 책은 더 큰 의미를 형성한다.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 정현종의 <나무> 전문

"나무는 사람들이 건들지만 않으면 태어난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산다. 나무는 공부도 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지도 않고, 태어난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들이 찾아온다. 해, 비, 바람, 새, 달, 그리고 사람들. 나무는 그러면서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소리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 인간들은 나무로부터 많은 것을 얻으면서도 그 가치를 간과한다. 나무의 희생적 모습에 대한 묘사는 결국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반성하게 한다.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이기심에 대한 경종이다.

수록된 시들에 대한 김용택의 아름다운 해설은 각 시인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다. 시만이 아니라 그 시를 창작한 시인에 대해서 품는 애틋한 감정은 곧 평범하지 않은 해설로 드러난다.

정채봉 시인의 시 <엄마>에 나타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시인 자신이 실제로 갖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김용택은 이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는 듯한 어조로 이 시를 전한다.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 정채봉의 <엄마> 전문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를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그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사나이가 어느날 운주사 와불을 찾아가서 신을 벗고, 양말도 벗고, 커다란 와불 팔을 베고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이 세상 처음으로 가만히 엄마를 불러 본다. 이 사나이는 바로 정채봉 자신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시는 어려워'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멀리 하는 것보다 간단한 설명이 깃들인 시집 한 권을 읽으면서, 보다 빛나는 감수성을 닦아 보는 건 어떨까? 시를 읽어보려는 그 마음이 존재할 때에 비로소 한 편의 시는 커다란 의미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시가 내게로 왔다 세트 - 전2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용택 지음,
마음산책,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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