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사! 이 여인은 바로...

[캠핑카 타고 유럽여행 8] 고슬라에서 환경운동가 이사벨 괴블을 만나다

등록 2004.01.14 21:37수정 2004.01.1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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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평원이 좀 넓다 싶으면 거의 100m마다 하늘 높이 풍력 발전기가 서있는 곳이 독일.

평원이 좀 넓다 싶으면 거의 100m마다 하늘 높이 풍력 발전기가 서있는 곳이 독일. ⓒ KOKI

유럽에 오기 며칠 전이었던 것 같다. 신문에 사진이 한 장 실렸다. 독일 반핵·환경운동단체 회원, 학생들이 철로 주변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주제는 '재처리 핵폐기물 반입 저지!'

짤막한 사진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재처리를 마친 핵폐기물을 독일로 다시 반입하려다가 그린피스 등 반핵·환경운동단체와 학생들의 시위로 운송이 지연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철로에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어 재처리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의 이동을 막고, 펼침막을 통해 "재처리 핵폐기물을 반대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라마 모자를 쓰고 나타난 이사벨 괴블

독일 고슬라(Goslar). 고슬라는 지금으로부터 1081년 전인 922년 인근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건설된 도시로, 11~12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황제들의 거주지였던 곳이다. 지금까지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12~13세기의 성당과 14세기의 길드 홀(상인단체의 집합소)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슬라는 그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많은 독일의 소도시다.

고슬라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와 함께 들어간 곳은 괴바(Kö bar). 우리는 하멜른에서 괴팅엔을 거쳐 고슬라까지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라 맥주라도 한 잔 하며 쉴 필요가 있었고, 또 카타지나가 자기 친구 한 명을 소개 시켜준다기에 흔쾌히 응했다.

a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와 함께 들어간 곳은 괴바(Kö bar).

카타지나 칼리노프스키와 함께 들어간 곳은 괴바(Kö bar). ⓒ KOKI

바에 들어가 일행과 포켓볼도 치고,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인터넷으로 겨우 이메일도 보냈다. 잠시후 요즘 유럽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인 '라마 모자'를 쓴 카타지나의 친구가 들어왔다. 카타지나가 소개한 친구는 21살의 청춘 이사벨 괴블. 그는 멀리 베를린의 한 바에서 DJ를 한다는 남자친구가 보고 싶지만, 끝마쳐야 할 공부가 있어 고슬라에 남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술이 좋은 건지 사람이 좋은 건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느냐', '2002년에는 월드컵도 했다', '혹시 한국에 오면 뼈다귀 해장국이 아주 진국이다'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사벨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또 우리도 독일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댔다. '독일 아이들은 하우스뮤직보다는 테크노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다'에서부터 '여기 사람들은 왜 해만 지면 거리에서 사라지냐', '도대체 바와 레스토랑밖에 안 보이는데 젊은이들은 어떻게 노느냐' 등등. 그리고 '독일에는 어쩌면 이렇게 풍력 발전기가 많냐'고.

이사벨 역시 이방인에게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는데, 마지막 풍력 발전기에 대한 대답을 하며 자신의 경험담 하나를 들려주었다. "풍력 발전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침을 튀겨 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사벨. 아뿔싸! 그가 바로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신문에서 봤던 '재처리 핵폐기물 반입 저지' 시위의 참가자였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본 사진 속 현장에 있던 이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앉아있다니….


a 이사벨 괴블(Isabell Göbl).

이사벨 괴블(Isabell Göbl). ⓒ KOKI

"지역별·단체별로 흩어져 있다가 시위 장소가 결정되면서 한 곳으로 모여 시작된 건데, 거의 1만 명이나 모였어. 철로에 드러누워서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수송을 지연시켰지. 경찰이 와서 결국 해산됐지만, 앞으로는 핵폐기물 이동이 점점 힘들어질 거라 믿어. 우리는 성공한 거야!"

당시 이사벨과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 라 아그에 있는 핵 재처리 공장 코제마에서 재처리된 핵폐기물이 독일 국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반핵·환경운동단체 회원들과 함께 철로에 몸을 묶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리 펼침막과 피켓을 만들고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미리 연락, 협조를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경찰이 출동할 것이었기에, 그들이 먼저 시위 장소에 나와 저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결 장소는 행동 개시 1시간 전에야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연락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비밀리에 준비된 철로 시위.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재처리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의 이동을 막을 수 있었고, 언론화에도 성공을 했는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있던 나 역시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반핵 시위 외에도 환경 관련 집회만 있으면 참가한다고 했다. 이사벨은 이번 시위도 독-프 국경에서 했기 때문에 고슬라에서 몇 백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이었는데, 독일 어디서 이런 시위가 열리든 무조건 달려간다고 했다. 지금 공부하는 것도 시민의 사회 참여에 대한 것이라고.

이사벨이 이렇게 환경운동에 열성인 까닭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환경인데, 그 보존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 사회에서 핵의 시대는 이미 지고 있다. 핵발전에 의한 에너지 수급률이 80%에 이르는 프랑스야 다소 둔감한 편이지만, 적잖은 서유럽 국가들은 핵의 위험성과 핵폐기물 처리에 따르는 진통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대체 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는 동시에 에너지 절약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이 유럽 사회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인데, 녹색당 등의 주장을 꾸준히 받아들인 독일 정부는 오는 2018년까지 현재 가동중인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좀 넓은 평원이다 싶으면 거의 100m마다 하늘 높이 풍력 발전기가 서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벨과 그의 동지들이 막으려 했던 재처리 핵폐기물은 원래 프랑스 것이 아니라 독일 것이었다. 그런데 왜 독일의 핵폐기물이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독일로 들어 오냐고? 간단히 말하면 독일에는 핵 재처리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재처리한 뒤 다시 독일로 옮겨오는 것이다.

한편 독일은 지난 97년 핵폐기물 수송 도중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한 데 이어, 98년 재처리 핵폐기물 수송 과정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해 일시적으로 수송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수송을 재개한 것인데, 이를 반핵·환경운동 단체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만무하다.

자국 이기주의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a 이사벨 괴블(Isabell Göbl).

이사벨 괴블(Isabell Göbl). ⓒ KOKI

그런데 여기서 반핵·환경운동의 이면을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까지야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핵에너지에 의존했다고 하지만 핵폐기물은 말할 것도 없이 반환경적이다. 어쩌면 이의 생성을 막기 위한 운동은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런 행위일 것이다.

독일의 사례가 그리 낯설지는 않다. 우리도 이미 97년과 2001년에 대만이 북한에 핵폐기물을 수출하려 한 선례가 있지 않았나. 대만이 서울에서 불과 10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해도 평산의 폐광 지역에 자신들의 중저준위 핵폐기물을 폐기하려 했던 사실이 알려졌던 것이다.

당시 그린피스와 국내 환경단체들의 저지가 있었기에 무산되었지, 만약 이 같은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메이드 인 타이완' 핵폐기물이 북한으로 수출될 뻔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의 반핵·환경운동 단체들은 자국 내 란위섬 핵폐기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들고 일어났지만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것으로 안다.

독일도 대만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핵발전이야 이제 포기하기로 했다지만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에 대해서는 각종 규제장치를 둠으로써 해외 이전을 촉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염색이나 각종 도료 산업 등은 규제가 덜한 동유럽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3국으로의 이전이 활발하다.

"물론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차차 환경오염 자체를 줄이는 방법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어?"

이사벨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차'라는 것이 함흥차사가 뻔한 현실에서 씁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기후변화협약만 해도 상대적인 불이익을 당한 것은, 이제 막 산업을 일으키거나 막 궤도에 들어선 후진국이거나 개도국 아니었던가. 참 씁쓰름한 현실이다.
a 괴바(Kö Bar) 내부.

괴바(Kö Bar) 내부. ⓒ KOKI

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입니다.

덧붙이는 글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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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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