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낫지 않는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 고약"

부스럼을 달고 살았던 대한 사람 그리고 아이들

등록 2004.01.16 16:58수정 2004.01.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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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야! 아부지 살살 좀 깎으세요."
"이놈아, 그게 말같이 쉽가니. 자, 니가 한 번 들여다 봐라."
"식경(飾鏡, 거울의 옛말)을 들다(들여다) 볼 수가 있간디요. 글도 거기는 피해가야죠."
"부스럼 난 데가 한두 군데냐?"


쇠죽 쑤던 아궁이 앞에서 머리를 깎다 말고 나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수동 이발기계 '바리깡'을 쥐고 "쓱싹쓱싹" 부지런히 손놀림을 하시는 아버지는 이발이면 '바리깡', 주사면 주사기(注射器)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셨고 마을에서는 꽹과리를 다루는 상쇠로 손놀림과 눈썰미 하나는 알아줬다. 그런 분이 내 머리를 죄다 뜯듯 하시다니.

"으~. 쓰라린 거. 아부지 쉬었다 하면 안 되끄라우?"
"헝 김에 해부러야제, 찔끔찔끔 허면 더 아푼 거시여. 얼른 끝내고 쇠죽 쒀줘야 헝께 잔말 말어!"

이발을 끝낸 나는 양잿물과 몽근겨(거친 왕겨의 반대말로 가늘고 고운 쌀겨. 사투리)를 섞어 집에서 만든 까무잡잡한 비누로 쇠죽 쑤며 데워둔 미지근한 물에 머리를 빡빡 씻었다. 중머리가 된 나는 머리엔 이제 부스럼 딱지는 물론 서캐 한 마리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진물과 핏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아가 아푸지 않냐?"
"아까침에 보다 덜 아파라우."

어머니는 아까쟁끼(옥도정기(요오드딩크)로 빨간 소독약 및 치료제)를 골고루 발라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머리와 무릎은 온통 부스럼 투성이였다. 자주 감아도 소용없었고 넘어지는 족족 종기가 들어섰다. 여름 한철 차도가 있을 뿐 종기로 가득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머리가 죄다 뽑혀 흉이 된 자국 때문에 더 이상 빡빡 깎는 까까머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형제들 모두가 그랬고 6~7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부스럼을 달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초반 이후에나 다소 완화됐다. 세월이 약이었던 시절 기생(寄生) 집단은 떠날 줄 몰랐던 것이다.


손발의 때는 자라 등처럼 쫙쫙 갈라져 부르터서 피가 솟았고 몸 속에는 다른 놈들이 성가시게 했다. 좁쌀보다 작은 하얀 서캐를 호롱불에 지져가며 태워 죽여도 그 때뿐이다. 독약이라고 해서 아이들 손에 닿지 않게 선반 위에 숨겨뒀던 이(蝨)약을 지푸라기 끝에 묻혀 발라도 잠시였다.

이가 잿빛 내복 위 아래 바늘땀마다 드글드글 했다. 바삐 움직이는 쌀만한 이를 잡아 손톱으로 꾹 눌러주면 검붉은 피가 공책 위에 툭툭 터져 나오는 흉칙한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스멀스멀 기어가는 흡혈귀와 회충 때문에 아이들을 살이 찔 틈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먹구름보다 더 지독한 고름 냄새에, 늘 코는 비릿하고 야릇하며 고약한 종기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산골 마을 맑은 공기에 농 짙은 부스럼 냄새를 맡는다는 건 고역이다. 더하여 심심할 때마다 딱쟁이(딱지)를 뜯으면 노랗고 붉은 피고름이 나왔는데 그건 웬만한 사람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거시기 아부지, 도저히 안 되겠네요. 수단을 써야지, 원. 이래갖꼬 애 잡겠수."
"담 장날 고약이나 하나 사오더라고…."

다음 장에 가신 어머니는 '김 약방'에 가서 고약을 한 봉지 사오셨다.

노란 기름종이에 붙은 흑갈색 고약(膏藥)을 밥솥단지 위에 잠깐 올려서 녹였다가 펴서 곪은 종기에 바르면 한동안 "쏙쏙" 아려온다. 뜨끔뜨끔한 고통을 참으면 누런 고름이 덩어리 째 쏙 빠져 나온다. 새살이 돋을라치면 상처를 과산화수소수로 소독하고 밀가루 같은 '다이진 가루(다이진산)'를 뿌려주면 그래도 아물었다. 이어 턱뼈와 목 양쪽 사이 움푹 들어간 부분에 생긴 계란 같은 커다란 혹도 차츰 작아졌다.

당시 어머니께서 사오신 그 약은 한마디로 종창(腫脹) 치료 효험이 뛰어났던 약이다. 국내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인 '이명래고약'(李明來膏藥)! 1905년 고(故) 이명래 선생에 의해 생산되다가 막내 따님인 이용재씨에게 이어져 국내 제약업계를 주름잡다 지난 2001년 문을 닫았다.

1987년 역사적인 6월 10일이었다. 남대문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내 곳곳을 점령했다. 얼마 안 가 대열은 최루탄을 쏘아대는 전경에 밀려 남대문 염천교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계속 쫓겨 서소문공원과 현 한국경제신문사를 거쳐 종근당 건물에 못 미쳐 골목길 주택가(현 약현(藥峴)길)로 접어들었다. 숨을 고르고 경기대 앞쪽을 향해 걷던 중 3층쯤 되는 작은 건물에 '이명래고약'이라는 오래된 간판이 들어왔다.

'그래 이 곳이 이명래 선생이 살았던 곳이구나.'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서울시 중구 중림동(中林洞, 중동(中洞)과 한림동(翰林洞)을 통합하여 만든 동) 그곳이 그 무지막지한 종기를 치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산실이었다니! 감개무량했다. 아직도 난 중림동 그 집과 라디오 광고 중 일부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잘 낫지 않은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 고약!"

덧붙이는 글 | 명래한의원 홈페이지 www.leemyungrae.co.kr

덧붙이는 글 명래한의원 홈페이지 www.leemyungr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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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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