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 늘어난 무 밥, 물리게 비벼먹었지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45]물컹물컹한 무 밥

등록 2004.01.17 13:51수정 2004.01.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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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둘둘 비벼 놓은 무밥

둘둘 비벼 놓은 무밥 ⓒ 김규환

보릿고개 끝자락 가마솥 하나로 버틴 그 때 그 시절


쌀 방아 찧어온 지 두 달이 채 안 됐는데도 어머니의 마음은 무겁기 만하다. 온 집안 식구들이 쌀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1모작 가을걷이 때 몇 번뿐이다. 보리를 심을 때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보리쌀 아홉이면 나머지를 흰 쌀로 밥을 짓는다. 위에 한 줌 올리고 만다. 그래야만 춘궁기(春窮期)에 보쌀(보리쌀의 사투리) 빌리러 다니는 것에서 해방된다.

가마솥이 뭔가? 잘 퍼진 밥을 만들어내는 밥솥 중의 최고의 명작이 바로 가마솥이다. 잠시 뜸을 들여 퍼지게 할 때나 잠잠할 뿐, 한번 끓었다 싶으면 솥뚜껑이 "짱-" 하며 날아갈 정도로 거세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마솥 밥은 맛있다.

센 불로 때면 밥물이 아이 코 풍선 불듯 넘치다가 맑은 날 안개 자욱하여 어둠침침한 부엌을 요란하게 하다가 이내 뽀글뽀글 말라비틀어지고 건조한 김이 난다. 불을 꺼내고 기다린다. 옆 국솥으로 불을 옮겨 끓이고 마른 나뭇잎 한 움큼 가져와 잠깐 불을 때주면 웬만한 보리쌀밥도 푹 퍼지게 마련이다. 이게 가마솥에 밥하는 방법이다.

어머니는 위 부분만 살짝 흔들어서 아버지 그릇에 퍼서 담고 몇 톨 남지 않은 쌀을 좌우로 마구 휘저어 끈덕진 밥을 만드신다. 그러다 보니 늘 돌을 씹는 사람은 아버지셨다.


"어? 조리질 안한 거시여?"
"……."
"퉤!"

순식간 무릎 꿇고 밥 먹던 우리들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온가족의 신경이 마비된 듯 멈춰 선다. 침묵이 오랜 동안 흘렀다. 이땐 아무나 모른 체 하고 먼저 숟가락질을 하는 게 능사다.


일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는 셋째 형. 그 소리를 따라 다른 사람도 각자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떠먹고 밥을 떠먹기 시작한다.

뉘(벗겨지지 않은 벼 알)는 송곳니로 자근자근 씹어 훅 불어 버리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돌은 어른들 사이를 이간질할 만큼 고약한 놈이다. 더군다나 차돌처럼 하얀 돌은 조리질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도 웬만해서는 찾아내기가 힘들다.

당신으로서는 매번 당하다보니 속고 산다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소화력이 좋은 우리는 오물오물 하다가 그냥 넘겨버리면 되는데 언제나 아버지는 꼭꼭 씹어서 드셨다. 보리보다 가벼운 잔돌과 쌀이 제일 위로 떠오르기 십상이고 따라서 돌을 씹기 일쑤였다.

반찬이라곤 묵은 김치에 싱건지(동치미), 소금물에 박아둔 매운 풋고추, 된장 실가리국(시레기국)에 간혹 시루에 직접 놓아기른 콩나물 무침이 다지만 여덟 식구가 함께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다.

a 채를 가지런히 썰어주세요. 그리고 바닥에 먼저 깔고 위에 쌀을 올리십시오. 물 양은 1할 가량 줄입니다. 전기밥통에다 해도 잘되는데 밑부분이 타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바닥에 무를 깔아 주십시오.

채를 가지런히 썰어주세요. 그리고 바닥에 먼저 깔고 위에 쌀을 올리십시오. 물 양은 1할 가량 줄입니다. 전기밥통에다 해도 잘되는데 밑부분이 타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바닥에 무를 깔아 주십시오. ⓒ 김규환

물긷고 무 꺼내러 가시는 어머니

겨울이란 아녀자들에겐 참 지독하다. 물길으러 가는 징검다리 위에서 넘어지기 일쑤고 물을 채워 설혹 무사히 건넜다손 치더라도 옹기 물동이에서 넘쳐흐르는 물이 똬리(동아리)는 물론이고 얼굴을 하염없이 타고 흘러 내려와 윗도리를 거쳐 아랫도리 고쟁이까지 내리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물을 질질 흘리면서 미끄러운 겨울 길을 걷기란 말로서 표현하기 힘들다.

수도가 없던 시절 동네 공동 우물은 한 곳이었다. 우물이 먼 마을 위쪽 사람들은 집 앞에 흐르는 냇물을 그냥 길러다 먹기도 했다. 그런데 악동들은 골목 경사진 곳마다 눈만 내리면 수십 번 발로 문질러 광을 내놓곤 한다. 제 어머니나 누나가 지날 수도 있다는 걸 몰랐을까. 그렇다고 못된 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도 그랬고 옆집 동무들도 다 그랬다.

고드름보다 더 반짝이며 뾰족 올라온 그 턱을 밟으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만다. 어둠이 깔리면 이런 자리를 지나치다 물동이 마저 깨뜨린다면 언제고 서방님께 '살림 거덜 낸다'고 쫓겨날지 모르던 때다.

물을 여러 번 길러 큰 통에 담아두고 일이 예서 끝나지 않는다. 눈이 사각사각 부서지는 뒤란 눈길 따라 빗자루 하나 대 바구니 들고 가시는 어머니. 도착하여서는 우지뱅이(짚으로 엮어 찬바람과 눈을 막아 얼지 않게 덮도록 만든 시설)를 한쪽으로 밀치고 한 움큼 짚을 묶어 막아둔 무 구덩이 입구를 조심히 쓸고 깨나가신다.

'꽝꽝 얼어붙었구먼!'

해질녘이었으니 징살맞게(심하게) 얼었다. 막아둔 걸 빼내고 무를 한 개 두 개 꺼내신다. 이왕 온 것 대여섯 개는 꺼내야 한다. 꺼낼 때 양껏 꺼내야 국 끓이고 쪼각지(깍두기의 사투리) 담고 무 밥도 해 먹을 수 있다. 무는 안에 있을 때는 시려운 줄 모르다가 하나하나 꺼내감에 따라 안에 있던 흙이 손에 엉겨 찬바람 한번 스치면 엘 듯 차갑다.

a 밥통에서 바로 헤집어 섞어 놓은 무밥

밥통에서 바로 헤집어 섞어 놓은 무밥 ⓒ 김규환

고구마, 감자 그리고 무 밥

칼날을 세워 "득득" 긁어 손질하고 "똑! 똑! 똑!"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무채를 썬다. 구유처럼 생긴 설거지 통 위에 반듯이 놓인 도마. 땅 속에 묻어둔 무를 막 꺼내와 채를 고르게 써는 건 김장 김치가 벌써 묵어서 시어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고구마, 감자를 넣어 얼마나 많은 밥을 해 먹었던가. 오늘은 고구마에 물려 무 밥이나 한번 해먹어 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콩나물밥보다 무 밥을 더 자주 하셨다. 조금이라도 달디단 음식은 꺼려하는 집안 내력에 그래도 무 밥이 더 낫다.

1/3만 남기고 큰 무를 채 썰어 뒀다가 밥 앉힐 때 전체 물 양을 1할 정도만 덜어내고 같이 앉히는데 먼저 썬 무를 바닥에 깔면 타지도 않고 무 밥이 완성된다.

어디 무로 만든 밥이 맛있어서 이랬겠는가. 식구 수는 많고 쌀은 적으니 죽만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래도 씹히는 밥을 먹으려면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양을 늘리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심정에서 하는 밥이다.

그 때마다 난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하러 느즈막이 태어나서 그런 고통을 준단 말인가? 그걸로 끝이면 다행이다. 바로 밑 여동생은 막내인데 나보다 다섯 살 아래다. 줄줄이 밥 달라고 떼쓰는 아이들을 그렇게 잘도 키워내셨다.

행주에 물을 묻혀 뚜껑을 닦고 손잡이를 잡아 한쪽으로 밀쳐 놓았는데 밥이 평소보다 두 배나 많아 보였다. 팔 길이의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밥을 푹푹 퍼 담는다. 이런 밥이라도 고봉으로 주고 싶은 게 어머니 심정이다. 아버지와 남자들 상이 차려지고 어머니와 여자들 상은 따로 차려진다.

a 대접에 퍼 놓은 무밥, 무채가 보이죠?

대접에 퍼 놓은 무밥, 무채가 보이죠? ⓒ 김규환

양념장이 맛있어야 비빔밥이 맛있다

김치, 국, 싱건지가 올려지고 오늘은 양념 간장이 추가로 올려진다. 양념 간장은 간장에 눈밭에 죽지 않고 겨울을 잘 버틴 향 가득한 쪽파를 숭숭 썰고 깨소금 듬뿍 치고 참기름 한 숟갈 넣고 고춧가루 조금 더하면 되는 맛난 장이다.

"야…야…문열어."

샛문으로 상이 들어오면 제비새끼처럼 밥 달라고 입을 벌린 까무잡잡한 자식들이 방안 가득 하다. 아랫목에 앉으신 아버지께서 한 술 떠드시면 그 때부터 밥을 먹을 수 있다.

대접에 퍼 담아진 무 밥에 양념장을 한 숟갈 떠서 휘돌려 끼얹고는 살살 젓는다. 원체 무른 밥이라 일반 비빔밥 젓듯 마구 젓지 않고 대충 서너 번 휘저으면 골고루 섞여 맛있는 밥이 되었다. 무 밥은 특별히 씹을 필요도 없이 입안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 없어졌으니 먹을 때뿐 곧 꺼지고 말아 소화력 하나는 의심할 수 없는 시절의 음식이다.

겨울만 되면 우린 무 밥에 '싸라기 죽' 먹고 살았다. 여기에 김 가루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걸 살 돈이 없던 때, 어머니는 마른 파래 무침을 내놓으시곤 했다.

a 맛난 양념간장을 끼얹고 몇 번만 비벼 주세요. 비빔밥의 생명은 고추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간장에 있답니다. 비율은 나중에 알려 드릴까요?

맛난 양념간장을 끼얹고 몇 번만 비벼 주세요. 비빔밥의 생명은 고추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간장에 있답니다. 비율은 나중에 알려 드릴까요?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을 어렵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참으며 굶기지 않고 잘 길러주신 모든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젯밤에 아내가 무 밥을 해줬습니다. 설밑입니다. 오늘 저녁 소중한 가족을 생각하면서 한번 드셔보세요. 콩나물밥만 맛있는 게 아니랍니다.

덧붙이는 글 먹을 게 없었던 시절을 어렵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참으며 굶기지 않고 잘 길러주신 모든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젯밤에 아내가 무 밥을 해줬습니다. 설밑입니다. 오늘 저녁 소중한 가족을 생각하면서 한번 드셔보세요. 콩나물밥만 맛있는 게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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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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