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위에서 지나간 청춘을 추억하다

<포토에세이> 제가 사는 일본 마을에도 첫눈 혹은 마지막 눈이 왔어요

등록 2004.01.18 17:18수정 2004.01.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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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내가 사는 일본의 작은 지방 도시에도 토요일 오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첫눈'이다. 이곳에서 맞는 세번째 겨울, 늘 이맘때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박눈이 내리곤 했다. 작년 4월 초엔 벚꽃이 만개한 위로 눈발이 날려서 장관을 이룬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전 중에 잠시 흩날린 정도였다. 비록 일년에 단 한 번씩이었지만 충만한 만족감을 얻었다고 기억된다.


겨울이 오면 으레 기다려지는 '첫눈'. 그동안 맑고 청명한 날들이 이어져서 첫눈에 대한 기대조차 가질 수 없었다. 또 지난 며칠 동안은 강풍이 세차게 몰아쳐 온 집안의 틈새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겠다고 아우성쳐대는 통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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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그런데 토요일 아침, 드디어 첫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넓고, 낮고, 어둡게 깔린 것을 보니 함박눈이 내릴 모양이었다. 지난 밤 뉴스에선 기따미시(北見市)라는 곳에 폭설이 내려 온 마을을 뒤덮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어떤 단층집은 처마에 닿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려서 집이 거의 눈에 파묻혔다. 주민들이 눈 속에서 집과 자동차를 파내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교통이 마비돼 출근길의 사람들은 스키복 차림으로 두세 시간씩 걸어서 회사로 가고 있었다.

기따미시(北見市)의 눈구름이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일까? 한국에도 토요일에 눈다운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그곳의 눈구름이 예까지 달려 온 것일까? 아니면 한국과 일본을 덮을 만큼 거대한 눈구름이 동북아의 하늘 아래에 형성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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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아무튼 너무 기쁜 나머지 눈 내리는 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혼자서 눈길에 나서기 위한 핑계는 '비디오 테이프 반납'. 어린 아이를 둔 가정 주부가 자신만을 위한 감성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짜낸 궁여지책이었다.

도로는 이미 눈이 녹아 질퍽거렸다. 눈이 쌓인 곳을 골라 밟으며 소담스레 내리는 눈 속을 거닐었다.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 봐 점퍼에 모자를 눌러쓰고 우산까지 받쳐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지간히 볼품없는 모양새다. 마음 속에 이는 아름다운 물결과는 영 어울리지않는 우스꽝스런 차림새다. 게다가 아주 느리게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폼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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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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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사람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도시의 설경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졌지만 인적이 드문 외곽으론 아직 아름다움이 살아 있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꽃들과 추위를 즐기는 꽃들이 눈의 무게를 받쳐들고있는 모양이 장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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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눈 내리는 넓은 운동장 끝에 서 보았다. 대학 밴드부의 쿵쾅거리는 연습 소리만 아니었어도 더없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을 것이다. 운동장 건너편의 산과 집들이 하염없이 눈에 묻히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담담해진다. 오욕칠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저주하고 망가뜨릴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만 가만 내려와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저 눈송이들에게서 살아갈 날들을 위한 지혜를 얻어야겠다고 거기에 가만히 서있었다. 사물을 두드려 요란스레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게 빗줄기라면 아무도 모르게 소리없이 내려와 어느틈엔가 세상을 점령해 버리는 눈송이의 존재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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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담담히 내리는 눈 속에 서서 30대 중반을 빠져나오는 지금의 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요란스레 살고 싶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본다.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젊은 혈기가 어떤 경로를 거쳐 점차 쇠락해갔는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중 한 장면, 가정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발을 들여 놓은 후 갈수록 퇴색되는 자신의 존재감, 중심은커녕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는 신세에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장면이 스친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할 때 모든 가능성을 예측하고 인지한 후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심사숙고를 거듭한 후 내린 결정일지라도 그에 따른 결과는 결국 운명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안타까울 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사람이 할 일과 절대자가 할 일은 그렇게 나뉘어 있는 모양이다. 그걸 깨달은 것 만으로도 앞으로의 인생이 한결 평탄해지려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되새겨 보는 한 가지는 절대자가 내미는 결과에 불복종할 수도 있는 나의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내미는 카드가 아무리 이치에 맞고, 옳고, 평화로운 것이어도 기꺼이 거부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자유의지에 말이다. 이미 그런 치기를 부릴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내게 불복종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나니 새삼 기쁨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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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미


나는 지금 울화와 분노의 터널을 지나 전에 걸어 본 적없는 낯선 길의 어귀에 서있다. 그 길 위에 서게 되리라곤 꿈도 꿔본 적 없는 생소한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 발을 내딛는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차분하고 담담한지 설명하기 어렵다. 마치 지금 내가 바라보고있는 눈 내리는 풍경이 그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듯 하다.

나이가 들고,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점점 무뎌져가는 감각과 감성, 정체성과 이상… 그런 것들 때문에 괴로웠다. 더불어 아줌마라는 타이틀로만 굳어져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줌마가 되는 게 싫은 것이 아니라 아줌마로 안주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세상일에 무감각하고 무덤덤해지는 내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누구 못지않게 멋진 아줌마가 되고 싶은데 갈수록 무지해져만 가는 내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의 내 맘을 닮아 담담히 내리는 저 눈발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덤덤해지도록 놓아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을 추스른다. 담담하게, 그러나 덤덤하지 않게 내 앞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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