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데 산엔 왜 가는 거야?

싫다는 아이 손목 잡고 겨울산을 오르다

등록 2004.01.19 09:33수정 2004.01.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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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들판을 하얗게 적시고도 모자랐는지 눈이 계속 흩뿌린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도, 싸락싸락 내리는 싸락눈도 아니다. 밀가루 입자처럼 작고 고운 눈가루가 흩뿌리는 것이라 내린 눈에 비해 쌓인 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도 눈 쌓이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눈 내린 산에 오르면 참 멋있겠다."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한마디 했다. 작년에 붓글씨 배운다고 서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실 아줌마들과 어울려 영월 주변의 산을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젠 시간만 나면 산을 찾았다. 덕분에 우리 가족도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산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든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눈 오는데 산엔 뭐하러 가?"

광수 녀석이 볼멘 소리로 한마디 했다. 눈 내리는 산에 가는 것보다는 친구 집에 가서 컴퓨터 게임이 더 하고 싶은 눈치였다. 형이 여행을 떠난 뒤부터 녀석은 집에 있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 녀석이 안쓰러워 데리고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도 정작 녀석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았다.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

눈 내린 겨울 산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른다며 달래며 멋진 사진을 찍어주겠노라고 겨우 녀석의 마음을 돌려 놓았다. 눈이 내려 미끄러울지 몰라 등산화를 챙겨 트렁크에 싣고 갔지만 정작 차에서 내려서는 깜빡 잊고 그냥 올라갔다.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것 같다. 새해가 되어 나이 한 살 더 먹더니 금방 그 효험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산길의 눈은 녹아 있네요.
산길의 눈은 녹아 있네요.이기원
눈이 녹은 산길은 진한 자주색 빛으로 녹지 않은 흰색 눈과 선연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눈이 쌓여 산길이 미끄러울까봐 걱정했지만 이정도라면 별 문제 없겠다 싶었다. 광수 녀석도 이젠 마음이 풀렸는지 눈덩이를 뭉쳐 '휙휙' 던지면서 산을 올랐다. 녀석은 소나무 줄기를 냅다 흔들어 뒤따르는 내게 눈 세례를 퍼부으며 깔깔댔다.

눈썰매 탄 기분이에요.
눈썰매 탄 기분이에요.이기원
땀흘리며 웃으며 올라가던 녀석은 내리막길에 이르러서는 주춤대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눈이 쌓여 있어 미끄럽기 때문이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중심잡기에 여념없던 녀석은 몇차례 엉덩방아를 찧더니 아예 주저앉아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이럴 때 비료 포대 하나만 있으면 눈썰매장 안부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며 장갑이 젖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녀석은 잘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엄마 도와주세요.
엄마 도와주세요.이기원
나지막한 야산이라 한시간 남짓 걸려 산 하나를 넘어 내려왔다. 눈은 계속 내렸다. 산 아래 평지에 이르러서 녀석은 엄마와 하얀 눈 위에 발자국으로 꽃잎을 만들었다. 문득 궁금해서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발자국으로 꽃잎 만들기
발자국으로 꽃잎 만들기이기원
"광수야, 눈 내리는 날 산에 올라가는 거하고 컴퓨터 게임 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더 좋아?"

"컴퓨터 게임이 당근 더 좋지. 그치만 오늘 처럼 산에 가는 것도 좋아."

대답을 마친 녀석은 눈내린 하얀 길 위로 저만치 달려갔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기원의 사이버스쿨(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기원의 사이버스쿨(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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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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