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혼자 해낼 수 있어요, 할아버지…"

영화 속의 노년(68) : 〈룸메이트〉

등록 2004.01.19 10:22수정 2004.01.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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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혹은 그 이상 산 사람들을 일러 백세인(百歲人, centenarian)이라고 한다. 만만치 않고 곡절 많은 생을 백년 이상 살게 되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고 겪고 느끼며 살다 가게 될까.

영화 속 록키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 부모님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셨고, 슬하에 둔 1남 1녀 중 아들이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하나 있는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난다.


여섯 살 난 손자 마이클을 혼자 손으로 키워내신 할아버지. 성인이 된 손자와 룸메이트가 되어 동거를 하기도 하고, 또 혼자 사시기도 한다.

어느덧 어엿한 의사가 된 손자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그들에게서 증손자들이 태어나고, 노쇠하신 할아버지는 손자 집으로 옮겨 평온한 여생을 보내신다. 증손들의 재롱을 보며, 물자 귀한 줄 모르고 살림 허투루 하는 손자며느리에게 잔소리도 해가며 할아버지는 모처럼 걱정 근심 없는 나날을 보낸다.

불만이라면 단 한 가지, 사회에서 나이가 많다며 일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할아버지는 유능한 제빵 기술자였다. 어느 날 손자며느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 떠나는 일만 없었더라면 할아버지의 여생은 편안하게 마무리됐을 것을….

불시에 아내를 잃은 손자는 완전히 넋이 나갔고, 어린 증손자들은 할아버지만 쳐다보고 있다. 부유하고 우아한 안사돈(손자의 장모)은 아이들을 자신이 데려가 기르겠다고 한다. 혼자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손자는 그 의견에 동의하고, 할아버지는 그에 맞서 아이들을 아빠인 손자의 손으로 기르도록 설득한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며 무례하고 혼자서만 잘난 사람이다. 그래도 손자 마이클과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각별한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잘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코를 심하게 골고 늘 잠꼬대를 하는 할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이클은, 다 자라 할아버지와 떨어져 살면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면증에 시달린다. 인턴 시절 할아버지의 집이 헐리게 돼 다시 할아버지와 룸메이트로 살아가게 되자 불면증에서 해방된다.

혼자 비디오를 보며 웃었다. 코를 심하게 고는 남편을 둔 내 처지가 생각나서였다.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서 숙박이 포함된 직원 수련회라도 가게 되면, 같은 방에서 자고 난 동료들은 늘 내 남편과 같이 사는 나를 걱정해준다고 한다. 옆에서 코를 그렇게 고는데 괜찮으냐고.


다행히 나는 초저녁잠이 많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반대로 남편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남편이 깊은 잠이 들면서 코를 골기 전에 나는 일찌감치 꿈나라에 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한 13년쯤 잠결에 코고는 소리를 늘 듣다보니 그것도 익숙해져서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면 남편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어려서 엄마, 아빠를 잃고 의지할 데라곤 할아버지 밖에 없었던 마이클은 아마 더했으리라.

이미 다 자라 어른이 됐지만 할아버지와 다시 한 방을 쓰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를 듣고 이불 속에서 슬며시 웃으며 잠드는 모습이 그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물론 마이클의 이 병은 아내를 만나면서 깨끗이 낫는다.

혼자 몸으로 이민 와 먹고살고 자녀들 기르느라 정신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생일 같은 것은 모른 채 사셨다. 열 다섯 살 마이클은 어렵게 돈을 모아 할아버지께 손목 시계를 선물한다. 할아버지는 답례로 현미경을 사 식탁 위에 놓아둔다.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잠든 척 하고 있는 할아버지. 늦게 들어온 손자는 냉장고 문을 열다가 식탁 위에 놓인 현미경을 발견한다. 탄성을 지르는 손자, 그 소리를 들으며 흔들의자 위의 할아버지는 싱긋 웃는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할아버지는 생활력과 독립심이 강해 혼자 살면서도 집안 일을 늘 손수 처리하고,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신문의 구인란을 꼼꼼히 살피기도 하고, 낯선 지역으로 이사 가서도 기죽지 않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는 결국 일자리를 구해, 최고령 제빵 기술자로 몸이 아파 쓰러질 때까지 은퇴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할아버지는 가족이 가족을 돌보는 데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아들에 이어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미 머리 하얀 할아버지였지만 자신이 손자를 맡겠다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섰다. 사랑에 더해, 가족과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어린 자녀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장모에게 보내려는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할아버지는 그 옛날 부모를 잃고 자기에게로 온 손자의 표정을 이야기 해주며, 증손자들 역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손자 마이클을 일깨워준다. 아내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마이클은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아이들에게로 눈을 돌린다.

병원에 입원해 누운 채로 107세의 생일을 맞으신 할아버지. 손자와 증손자가 만든 케이크로 축하를 받았다. 그러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자에게 '네가 늘 자랑스러웠다'고 고백하신다. 이제 혼자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손자를 믿고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씀이었다.

97년인가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한 명 눈에 들어왔는데, 마이클의 아내 베스이다. 베스는 사회복지사(social worker)로 가난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의 마음을 잘 읽어내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알기에, 마음 문을 꼭꼭 닫아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열 수 있는 사람이다.

같이 살자는 손자와 그러고 싶지 않다는 할아버지의 팽팽한 대립 사이에서 베스는 '할아버지 대하는 법'을 이야기하며 중재에 나선다. 할아버지와 손자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본 적 없이, 무조건 행동하고 그저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것. '평생 돌봐준 손자에게 기회를 달라'는 손자며느리의 간곡한 청에 할아버지는 두 손을 드신다.

아들과 며느리에 나중에는 손자며느리까지 먼저 보낸 결코 평탄치 않은 인생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강한 생명력과 자기 생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은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 소리 높이지 않고 알려준다.

할아버지의 그런 미덕이 없었더라면 백년이 넘는 생의 길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목숨의 분량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내용이 가득 차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웃음과 재미에 가슴 뭉클함을 함께 주는 영화. 몸은 비록 노쇠해도 정신적인 강건함을 통해 노년의 삶이 지니는 가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늙음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가지며, 거기에는 또 어떤 소통이 필요한지 오늘도 영화 한 편에서 배운다.

덧붙이는 글 | (룸메이트 Roommates, 1995 / 감독 피터 예이츠 / 출연 피터 포크, D.B. 스위니, 줄리안 무어 등)

덧붙이는 글 (룸메이트 Roommates, 1995 / 감독 피터 예이츠 / 출연 피터 포크, D.B. 스위니, 줄리안 무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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