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막걸리에 하얀 눈이 녹아들고

[사진]온 산이 한 폭 동양화 같은 도봉산

등록 2004.01.19 17:05수정 2004.01.1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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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도봉산 설경.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도봉산 설경.유성호
눈이 내립니다. 도봉산 초입의 매표소를 지날 때부터 내린 눈은 산행 내내 얼굴을 간지럽힙니다. 이놈의 눈이 시도 때도 없이 안경에 내려앉더니 어느새 물방울이 되어 시야를 어지럽힙니다. 모처럼 만에 기분 좋은 설중(雪中) 산행을 시기하는 것일까요. 산행 내내 내린 눈으로 산은 은백색으로 뒤덮였습니다. 마치 동양화 한 폭을 그려 놓듯이…

눈 쌓인 산은 담백한 수묵화 같다.
눈 쌓인 산은 담백한 수묵화 같다.유성호
북한산국립공원 도봉 매표소를 지나 도봉산으로 올랐습니다. 눈발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모자 위를 사각거리며 스치는 눈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바위 위에도, 퇴색한 떡갈나무 위에도 눈은 평등하게 쌓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에도 눈은 어김없이 쌓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에도 눈은 어김없이 쌓입니다.유성호
천년 동안을 굵어져 온 아름드리 소나무에 쌓이는 눈의 무게가 버거워 보입니다. 솔잎을 잔뜩 달고 있는 솔가지가 점점 아래로 처집니다. 마치 푸른 얼굴에 하얀 머리를 한 노인 같습니다. 그 나무 노인이 산꾼들에게 눈 오는 산길을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듯합니다.

산을 오릅니다. 눈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산을 오릅니다. 눈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유성호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이 거세지면서 제법 눈이 쌓입니다. 전날 내린 눈이 채 녹기 전에 새로운 눈이 온 산을 뒤덮어 설원으로 만듭니다. 서울에서 이런 풍광을 경험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산행 내내 운수 좋은 날이라고 되뇌입니다.

눈은 앉을 자리만 있으면 어김없이 쌓인다.
눈은 앉을 자리만 있으면 어김없이 쌓인다.유성호
경치에 도취해 산길을 걷다 보니 식사 시간을 제법 넘겼습니다. 눈이 많이 온 터라 밥 먹을 만한 터를 잡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푹신한 눈 위에 자리를 깔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음식을 먹었습니다. 산에서 먹는 과메기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막걸리를 곁들였습니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유성호
제법 많이 걸었습니다. 이제는 산을 내려가야 할 때입니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힘들고 안전사고의 위험도 높습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미끄럼을 조심해야 합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약간의 막걸리'가 일을 낸 것입니다. 다행히 입구에 와 있던 119구급대의 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서 여섯 바늘을 꿰맸습니다.

다정한 부녀의 나들이. 언 손을 꼭 잡은 모습이 정겹다.
다정한 부녀의 나들이. 언 손을 꼭 잡은 모습이 정겹다.유성호
산에서 거의 다 내려 왔습니다. 멀리 언 손을 꼭잡고 내려오는 부녀(父女)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산 아래 매표소 어귀에는 <북한산찬가>라는 시비(詩碑)가 서 있습니다.


소설가 이병주의 <북한산 찬가>.
소설가 이병주의 <북한산 찬가>.유성호
북한산 찬가

나는 북한산과의 만남을 계기로
인생이전(人生以前)과 인생이후(人生以後)로 나눈다.


내가 겪은 모든 굴욕은
내 스스로 사서 당한 굴욕이란 것을 알았다.

나의 좌절, 나의 실패는 오로지 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의 배신은 내가 먼저 배신했기 때문의 결과이고
애인의 변심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의 결과라는 것을 안 것도
북한산상에서이다


멀리 도봉이 운무에 가리운 채 잘가라고 손짓한다.
멀리 도봉이 운무에 가리운 채 잘가라고 손짓한다.유성호
산 어귀를 빠져나왔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뭔가를 쳐다보고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좇자 운무에 살포시 가려진 도봉산이 서 있습니다. 절경입니다. 자연은 한없이 주는 듯했습니다. 날카로운 아이젠에 밟혀 아프기도 하겠지만 산은 안녕히 가라며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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