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청 발라 한 입 베어 물자 사르르

[설밑 시골풍경 3]유과 한과, 강정 만드는데 이틀이나 걸려

등록 2004.01.20 09:14수정 2004.01.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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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포장된 한과 꾸러미
잘 포장된 한과 꾸러미김규환

일찌감치 튀밥을 먼저 튀겨 놓고


겨울철이 되면 엿장수 아저씨 "찰칵찰칵" 가위를 흔들며 시골마을로 온다. 대장장이도 농한기를 이용하여 연모를 수리하러 온다. 여기에 한 달에 두 번은 튀밥 튀기는 할아버지도 죄다 오르막길인 우리 동네로 손수레를 끌고 지쳐서 올라온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린 엿장수, 대장장이, 튀밥 할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며 돕기도 하고 구경하고 즐겼다.

집집마다 잘 말린 튈 재료를 준비해와 아이에게 떠맡기고는 어머니들은 때가 되면 돈을 치르러 나오기만 할뿐이다. 강냉이와 말려 둔 떡을 섞어 튀고 보리쌀도 튀기고 쌀도 따로 분리해 튀겨 놓는다.

바짝 옆에 붙어 있다가 "저리들 비켜라"하면 잠시 뒷걸음질쳐서 귀를 막고 있다가 "펑!" 소리와 함께 일제히 아이들은 기계 옆으로 달려든다. 그때 할아버지보다는 튀밥의 주인인 할머니들이 "야 이놈들아 저리 안 비껴!" 하고는 아이들을 물리치지만 빙그르르 돌아 주위로 몰려와 한 개라도 주워 먹기 바쁘다.

제일 먼저 떡을 튀긴 손바닥만한 걸 먹고 다음으로 강냉이를 먹는다. 떡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 없어진다. 튀겨도 잔존물(殘存物)이 이(齒) 사이에 끼는 옥수수는 오늘은 별로 인기가 없다. 옥수수는 심심할 때 주전부리로 적당하다. 보리쌀은 씹히는 맛이 최고다. 쌀로 튄 튀밥은 크기가 다섯 배는 너끈하게 커져있다.

마침 우리 것이 다 되어 잘 튀겨진 쌀 튀밥을 양손에 한 움큼씩 들고 있다가 입에 쑤셔 넣고 어머니 뒤를 쫄래쫄래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쌀 튀밥을 비닐 봉지에 잘 싸매 뒀다가 설 무렵 들깨, 검정 깨, 검은콩, 해바라기 씨를 볶아 그 달디단 조청에 버무려 종류별로 '오꼬시(강정의 일본말)'를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 때까지도 '뽀빠이' 한 봉지보다 물리지 않고 제일 맛있게 먹던 과자였다.

튀밥 튀기는 할아버지
튀밥 튀기는 할아버지김규환

찹쌀로 한과 유과 판을 만들고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장성을 거쳐 광주-담양-곡성-화순 백아산 우리 집까지의 길이 흔히 말하는 한과(韓菓) 유과(油蜜果, 油菓)의 고장이다. 지금도 담양 전역과 창평면 인근엔 한과집이 널려 있고 조청과 엿의 고향이기도 하다. 집집마다 과자를 만드느라 분주했던 지난날 어머니와 나는 늘 단짝이었다.

어머니는 큰댁에 가서 안반을 가져다 깨끗이 닦아 놓으셨다. 빻아둔 찹쌀을 반죽해서 마치 진흙을 갖고 놀 듯 흥겨운 놀이가 시작된다. 몇 번을 치대면 끈기가 있는데 그걸 한 줌 씩 떼어 안반 위에 올려 어머니는 홍두깨로 나와 동생은 소주병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어 널찍하고 얇게 늘려 편다.

"엄마 됐는가 보싯쇼."
"두어 번만 더 밀그라."
"엄마 내껀?"
"그래 연순이꺼도 됐구만. 아가는 엄마한테 줘라."

우리가 밀어준 얇은 쌀 반죽을 칼로 사각으로 어른 손바닥 보다 조금 작게 오린다. 이어 방바닥에 펴 널고 나머지 조각을 또 뭉쳐 밀고 또 밀었다. 2시간여 같은 작업을 하다보니 졸음이 몰려온다. 따뜻한 방안에는 유과 재료를 널어 말리느라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암. 어 졸린 거. 엄마 한 숨 자야쓰겄소."
"하마(거의) 다했응께 건넌방에 가서 자라."
"예. 쬐까만 자고 올께라우."
"그려."

어둠침침한 겨울 낮잠은 한없이 이어졌다. 깨어보니 어머니는 부산히 움직이신다. 설을 나흘 남겨둔 날 오전부터 어머니는 바쁘셨다. 자는 사이 유과 재료를 가지런히 펴서 방안 가득 널고 콩나물에 물을 주고 나락 가마니에 가서 벼를 한 됫박 가져와 몇 줌 안 되는 햇볕에 널어 말린다. 지푸라기 겉잎을 벗기고 싸리나무와 삭정이를 정지 나무 청에 잔뜩 쌓아두고 쌀알 튀기는 작업을 시작한다.

들깨 강정의 향긋함
들깨 강정의 향긋함김규환

짚불로 벼를 튀겨 옷을 준비하고

하지만 이 때는 아직 나무가 필요 없다. 짚 다발 두 단만 있으면 된다. 왜인고 하니 짚은 탈 때만 셀 뿐 조금이라도 늦추면 가마솥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려 불 조절이 쉬웠다. 꺼질라치면 한 줌 넣고 불이 싸다('세다'의 사투리) 싶으면 잠깐 넣지 않으면 된다.

짚불을 살라 불을 때자 솥 타는 가열된 냄새가 확 밀려 왔다. 이 때 어머니는 벼 서너 줌을 일시에 넣고 빗자루 모양으로 뭉쳐 둔 지푸라기로 슬슬 쓸면서 타지 않게 한다.

"타닥 톡톡"
"토도독 톡"

서로 싸운 겐가. 아수라장인지 아비규환인지 한참 다투더니 잠잠한 틈을 타 일제히 톡톡 불거져 하얀 속살을 "히히히" 웃으며 드러낸다. 대체로 쌀 튀밥이 고르게 잘 빠진 잘록한 모양새를 갖고 있다면 껍질 째 벼를 튀기면 연꽃 마냥 흐드러지게 웃고 있다. 껍질을 뚫고 나오느라 강한 압력에 굴복을 하고 만 것이다.

얼른 바가지로 퍼서 널찍한 키에 담아 두고 다시 시작한다. 이제 적당히 데워져 몇 번 휘젓지 않아도 금방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어머니는 굳이 이렇게 까지 하는 까닭은 유과 옷 입힐 때 튀밥보다 훨씬 맛있기 때문이다.

정성과 손맛으로 만든 과자는 그래서 맛있는가 보다. 모두 마치고 손으로 알과 껍질을 고르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나락 까끄라기가 성가시게 할뿐이다.

쌀 튀밥으로 강정을 만듭니다.
쌀 튀밥으로 강정을 만듭니다.김규환

술 익고 유과 판 널려 마르고 콩나물 자라던 방

낮에도 불을 때서인지 방안은 윗목까지 따뜻했다. 차츰 물기가 빠지고 투명하고 꼬들꼬들 말라 간다. 크기도 약간 줄어 간신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잘 자리만 마련이 되었다.

그날 방안은 온통 설을 맞이하기 위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뽀글뽀글" "피식" 소리를 내며 술이 익어가고 시루 속 콩나물도 덮개를 툭 밀고 올라왔다. 다른 집보다 한칸은 더 있는 큰 방안 가득 유과 만들 재료도 널려 있다.

쌀 강정의 파삭파삭함
쌀 강정의 파삭파삭함김규환

연기 안 나는 싸리나무를 때서 유과 굽는 어머니의 땀방울

이제 사흘을 남겨뒀다. 아침을 먹자마자 딱딱하게 굳은 마른 찹쌀 판을 모아두고 참기름을 담아오신다. 널찍한 그릇에 담긴 참기름을 소나무 잎을 꺾어 솔로 대신하여 발라서 옆 함지에 옮겨 담는다. 이렇게 모으고 나니 온 방안을 차지했던 양이었지만 시집 열댓 권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부엌으로 나가 불을 땔 차례다. 어제 갖다 놓은 비싸리 나무를 태운다. 싸리나무와 명감나무가시 청미래넝쿨은 6.25 때도 연기 한번 내지 않아 빨치산 산사람들이 즐겨 쓰던 땔감이었다고 한다. 일정한 불로 때고 있는 사이 어머니는 재료를 다 들고 나와 가마솥 위에 발을 툭 걸쳐 기름 한번 바르고 한 덩이 씩 넣어 튀긴다.

"불을 살살 때라와…."
"예."

불 때기를 잠시 멈추고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한 넓이의 딱딱한 판이 열을 만나자 부풀어오른다. 숟가락 두께의 얇은 것이 어느새 손가락 두께보다 더 불어나 있다. 그 사이 어머니는 기름이 주르르 흐르는 일을 솥에 바짝 붙어 하시느라 땀을 주르르 흘리고 계신다.

나는 석작(대로 만든 사각 대바구니의 일종)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유과를 손으로 만져봤다. 흐느적거리던 작은 것이 300쪽 짜리 소설책으로 변해 있었다.

"원메, 요로코롬 커져 불었네."
"어디 오빠 나도 한번 만져보게."
"허벌나게 크쟈?"
"잉."

검은 콩으로 강정을 만들면...
검은 콩으로 강정을 만들면...김규환

조청 발라 옷 입혀 주고 한 입 베어 물자 사르르 녹는 유과

집에 있는 석작의 절반은 썼을 것이다. 두 시간 넘게 튀기고 다시 방으로 모든 걸 챙겨 들어갔다. 조청 단지도 방안으로 들여졌다. 새로 솔잎을 서너 개 꺾어와 노란 고무줄로 묶고 솔질을 한다.

"엄마 광방에서 쌀 튀밥도 갖과야제."
"아녀 됐다. 여기다간 머시냐 나락 튀긴 걸 마를 것이여."
"알았어라우."

끈적끈적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의 조청이 손에 묻어도 아랑곳 않고 한 손엔 튀긴 걸 쥐고 조청을 바르다가 옆에 준비된 '밥티' 위에 올려 오복이 뿌려주고 뒤집어서 한번 더 뿌려준다. 골고루 묻었다 싶으면 탈탈 한번 털어 낸다. 이게 완성품이다. 옷을 입은 유과는 눈으로 보는 것마저 먹음직스럽다.

"한나만 묵어봐도 되지라우?"
"다 먹고살자고 하는 것잉께…."
"연순아 오빠랑 나눠 먹자."

바삭바삭 아사삭 씹히는 그맛 그후 살살 녹는 그맛에 빠졌던 지난 날-요즘은 물엿으로 만들어선지 예전 맛이 잘 안납니다.
바삭바삭 아사삭 씹히는 그맛 그후 살살 녹는 그맛에 빠졌던 지난 날-요즘은 물엿으로 만들어선지 예전 맛이 잘 안납니다.김규환

바삭바삭 잘 튀겨진 것이 서릿발인지, 새벽같이 얼었다 녹은 눈발인가 모르게 책 두께의 유과는 겉만 단단해 보일 뿐 두 손으로 약간 힘을 주자 툭 부러진다. 그 사이에 있던 공간이 터널처럼 넓게 뚫려 있는데 잔설(殘雪)인 듯 이제 막 생성되는 동굴의 종유석(鐘乳石)과 석순(石筍)이 위 아래로 무수히 서로 잇대있다.

"사각" 한 입 베어 물자 "스르르" 소리도 없이 녹아 없어진다. 잘 말려서 인지 꽝이 배겨있지 않고 일정한 느낌을 주는 본판에 조청 맛이 어울렸고 입힌 벼 튀밥이 고소함을 더한다.

"정말 맛있구만. 엄니도 한 입 드싯쇼."
"그려."

바르고 또 발라 차곡차곡 석작에 담아 나간다. 설쇠려면 큰댁에 한 통, 설 다음날 재 넘어 외갓집에 한 통을 가져가야 하니 적지 않은 분량을 해나갔다. 다 발라서 조청이 녹지 않게 광에 갖다 놓고 몇 남지 않은 가족이 모여 저녁밥을 먹었다.

그 많은 일을 했는데도 어머니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강정 만드는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내일은 떡쌀을 담근다 하셨다. 나는 유과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잠을 자면서도 "냠냠냠" 소리를 냈고 입 주위를 혀로 낼름 핥아먹었다고 한다.

이 꾸러미를 석작이라고 하는데 예전엔 여기에 몇개를 채웠는지 모릅니다. 선물로 최고였지요.
이 꾸러미를 석작이라고 하는데 예전엔 여기에 몇개를 채웠는지 모릅니다. 선물로 최고였지요.김규환

덧붙이는 글 | 이런 모습 이젠 없어도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런 모습 이젠 없어도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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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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