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이 띄우는 네팔 야생의 힘

여행 에세이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등록 2004.01.21 15:10수정 2004.01.2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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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책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 이가서

"한순간으로 충분한 것이 있다. 쿠마리 사원에 들어서는 것도 그런 일일 것이다. 한순간에 그 귀기가 고스란히 몸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ㅁ자의 공간으로 들어섰던 그 괴괴한 순간을 나는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외롭고 괴롭고 허무하고 아프고 슬프고 무서울 때에…."

살다보면 이런 날들이 있다. 왠지 슬프고 서글프고 허무할 때. 소설가 전경린이 40세에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아픔을 안고 있는 한 여자의 독백이다. 아이들을 한국에 내버려두고 네팔로 떠난 작가는 이곳에서 느낀 감정들을 하나하나 토해내기 시작한다.


네팔의 네와리족이 믿는 쿠마리는 첫 생리를 하기 전의 여자 아이를 신으로 모시는 풍습이다. 서너 살 무렵부터 성녀로 모셔졌다가 생리를 하게 되면 일반 여자로 내쫓김 당하는 쿠마리. 예견된 불행을 안고 사는 성녀의 모습은 서글프기만 하다.

중국식 목조 건물들과 회교 사원, 인도식 탑과 라마교식 색채 벽화가 뒤엉킨 도시 카트만두는 오래되고 퇴색된 공간이지만 평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버려진 듯 하면서도 신의 축복을 받는 네팔에서 작가는 꿈을 꾸듯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카트만두의 이른 아침 공기 속에서는 야생의 시린 눈 냄새가 났다. 아마도 히말라야의 눈 냄새겠지. 네팔어로는 히마와 알리아의 합성어. 눈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눈이 머무는 그곳 히말라야 중앙 지대에는 거대한 설인 예티가 눈 위에 발자국을 쿵쿵 찍고 눈바람을 일으키며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야생의 공간에서 한국의 삶은 머나먼 이야기이다. 하지만 작가는 두 아이에 대한 사랑, 한국에서 힘들었던 생활 등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야생의 네팔 풍경 속에 하나하나 새겨 넣는다. 그 과정은 고요한 평화로움과 번잡한 생각의 공존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책의 첫 부분에서 청춘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고 길었던 허열과 같은 청춘은 정말로 지나가 버리고, 작가는 바닥을 드러낸 삶의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여자들이 생각하는 삶이란 해일 같은 난폭함이 사라진 갯벌로 묘사된다.


하지만 작가는 흘러가듯 머무르는 네팔 체류를 통해 40세의 여성성을 찾는다. 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작가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와 새로운 시작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꽃과 검게 탄 얼굴들과의 만남은 향기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다.

네팔에서 만난 한 한인 스님은 작가에게 세상의 관념으로 스스로를 동여맨 포승줄을 풀라고 말한다.


"내가 모르는 내가 한 일로 마음을 괴롭히지 말게나. 삶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감정들을 샅샅이 느끼고 바라보고 그대로 즐기시게. 다 사는 일이니, 괜찮지 않은가. 자신이 지은 업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 생각들, 느낌과 인식들, 괴로워하고 갈등하고 두려워하는 나를 죄책감도 나무람도 없이 바라보시게…."

여행의 목적과 기대는 저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결국은 삶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목적이 클 것이다. 작가는 혈연과 지연, 마음과 도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은 여행을 통해 삶 자체가 상처를 내며 곪았다 나았다 하는 것의 반복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유기한 엄마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긴 여정을 통해 얻은 것은 바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성애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딜 가나 작가를 따라 다니면서 한국으로의 회귀를 재촉한다.

"허공의 끝까지 날려가는 풍선처럼 아득하던 끝에, 문득 엄마 없이 잠들어 가는 아이들의 밤이 떠올랐다. 땀 냄새 나는 베개에 스밀 어둠 속의 눈물도…. 그것은 나의 눈물이기도 했다. 열흘을 집에서, 스무날을 작업실에서 보낸 그런 밤들이 몇 년에 걸쳐 계속되어 온 것이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수습할 수 없는 회오의 슬픔이 몰려왔다."

살다 보면 자신의 꿈을 좇느라 잃어버린 것들도 많다. 모든 것을 두 손에 쥐고 뛰려하지만 그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가는 또 다른 꿈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꾸는 꿈은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늘 존재하면서 '나'라는 한 개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작가가 선택한 길, 소설가로서의 삶, 그리고 꿈을 꾸듯 떠난 네팔 여행은 그녀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녀 자신을 형성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쓰는 이 에세이는 바로 네팔에서 얻은 또 다른 삶의 의미이다.

늘 상식적인 것을 외면해 온 그녀의 삶, 그것은 그녀가 머무르는 한국의 집에서도 나타난다.

"서향집이거나, 바닷가의 습기가 차는 집이거나,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 집이거나, 너무 길거나, 너무 어둡거나…. 늘 그런 집이었어. 집 자체 보다는 늘 집 주변에 홀려 이사를 다녔고, 한사코 상식적인 집들을 외면해 왔으니, 내 운명의 의도였을까."

늘 무언가를 동경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은 네팔 여행을 통해 그 꿈의 한 자락을 맛보게 된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존재하는 신의 고장 네팔에서의 생활은 40세의 그녀를 새롭게 탄생하게 하고, 결국 그녀는 책의 제목처럼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는" 희열을 얻는다.

지인들이 그녀에게 말하듯이 서늘한 야생적 기운을 얻고 돌아온 네팔 여행. 그것은 아마도 "삶과 죽음과 애욕과 운명을 향해 활짝 열려진" 네팔의 힘일 것이다. 그녀가 띄우는 네팔의 정기를 담은 불꽃 접시가 독자의 상념에 가 닿는 순간, 그 야생의 힘은 환한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전경린 지음,
이가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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