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래한 맛에 혀 달아나는 줄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 15] 사카린 물 장독대 위에 밤새 얼려 먹던 아이스크림

등록 2004.01.29 08:07수정 2004.01.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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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위 눈 속에 파묻어 놓기도 했습니다. 날아가지 말라고.
장독대 위 눈 속에 파묻어 놓기도 했습니다. 날아가지 말라고.김규환

"하드여~ 하드여~" 소리에 환청이 들리던 여름철


여름엔 '하드' 파는 아저씨 짐바리 자전거 뒤를 졸졸 따랐다. 비료 부대나 보습 깨진 것, 뚫린 양재기를 부모님 몰래 가져다주고는 설탕물 가득한 하드를 하나 받는다. 그 달콤하고 속 시원한 생전보지도 못했던 맛난 것을 동무들에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랑하면서 하나 쭉쭉 빨아댄다.

빨다보면 아깝게 흘러내리는 양이 1/5나 되었지만 오래 먹으려면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어렵게 장만한 걸 베어 먹어버리면 허망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입에 질질 흐르고 손에 흘러 쫀득쫀득해지면 손가락 마디마디를 핥아먹던 시절 "하드여~하드여~" 그 소리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그보다 더한 환청은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 다 먹고 나면 하나를 샀던 터라 아저씨 주위를 맴돌 수 있었다. 한 여름 찌는 더위에 그늘에 세워진 자전거. 아이스박스 안에서 녹아 내려 "똑똑" "똑! 똑! 똑!" 떨어지는 물을 서로 빨아먹겠다고 입을 갖다대던 아이들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내린 게 아닌 공기가 얼어붙은 성애가 바닥으로 떨어지던 걸 맛있다고 한 번 더 빨려고 발버둥쳤다.

이런 고드름을 따먹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드름을 따먹기도 했습니다.김규환

군것질 혹은 주전부리, 그리고 허기

그 시절 어린아이들에겐 그나마 여름은 군것질거리가 더 있었다. 들에 가면 오디, 산딸기, 버찌에 가을로 이어지면서 머루와 다래가 간간이 입맛을 다시게 해줬으니 심심한 줄 모르고 허기를 채웠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서리맞은 고욤(감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작은 열매)이나 칡뿌리를 캐먹고 살던 우리는 고구마 물리게 먹고 눈밭에 지푸라기 덮어둔 무, 배추 뿌리도 심심찮게 뽑아서 송곳니로 슬슬 돌려가며 겉만 훑어 깎아 먹고 간혹 옥수수 튀밥이나 먹었다.

식구도 많아 그 궁한 입을 달래기 힘든 때 일상의 먹을거리는 싸라기 죽, 무 밥, 고구마 밥, 콩나물밥에 싱건지국과 김치국, 끓인 밥, 눌은밥(누룽지. 마른 것은 '깐밥'이라 하여 구분하기도 했는데 깐밥이 많이 나오면 식량 축내고 살림 못한다고 야단맞던 때가 있었다), 감떡, 수제비와 꽁보리밥이었다.


잠깐 배만 볼록하게 채우면 그걸로 끝이었다. 허기를 간신히 면한 상태에서 쑥쑥 자라는 아이들에겐 고역이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뭔가 먹어주지 않으면 서럽기 그지없었다. 궁금한 입을 가만 놔둘 수 없을 무렵 도시 공장에서 하나씩 선보인 아이스크림까지 우릴 조롱했으니 감내할래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살얼음을 깨서 베어 먹어도 그만입니다.
살얼음을 깨서 베어 먹어도 그만입니다.김규환

부엌으로 들어가 사카린 물에 녹이고…

아직 입춘을 며칠 남겨둔 어느 날 훌렁훌렁한 김칫국을 끓여 저녁밥을 먹고 나는 잿빛 내복바람에 삐거덕거리는 정지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아무 것도 아녀."
"배고푸냐?"
"아녀라우."

간장종지와 숟가락을 챙기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가 밝지 않으셨던 어머니께도 들리는가 보다. 찬장 안을 뒤져 지난 설 때 쓰고 남은 사카린을 찾는다. 이리저리 봐도 사카린 봉지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사까리 없다요?"
"뭣 헐라고?"
"딴 게 아니구라우. 사까리 두 개만 찾아줏쇼."
"설강 한삐짝에 있응께 한번 찾아보그라."
"예. 젤 왼쪽에요?"
"그려."

종이에 꼬깃꼬깃 싸둔 봉지는 식혜 만들고 나서인지 훨씬 작아져 있었다. 조릿대(산죽 山竹) 고동은 방에서 나갈 때 챙겨 마루에 놓아뒀다. 큰그릇에 물을 담고 사카린을 넣고 휘휘 저어줬다. 그 물을 스테인리스로 만든 간장 깍정이 세 개에 3/4 정도씩 나눠 부었다.

흐르지 않게 조심히 들고 밖으로 나간다. 싸늘한 기운이 여전한 으쓱한 밤 차 오르는 달빛을 받은 장독대 주위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배나무와 감나무 아래로 하얀 눈이 녹지 않고 슬슬 불어대는 밤바람에도 반짝 빤짝 빛났다 어두워졌다하며 일렁인다.

대롱대롱 매달린 작고 동글동글한 얼음덩어리도 나무하러 오가며 많이 먹었지요.
대롱대롱 매달린 작고 동글동글한 얼음덩어리도 나무하러 오가며 많이 먹었지요.김규환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자고 일어나니 달콤 쌉싸래한 아이스크림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맑고 시원한 바깥바람이 허파 깊숙이 스며들었다. 제일 크고 반반한 독 위에 깍정이를 올리고 마루에 놓아둔 한 뼘 길이쯤 되는 통 조릿대를 박아두고 잠깐 쳐다보고 방으로 뛰어 들어 왔다.

"추운데 바깥에서 뭐한 겨?"
"응. 낼 아직에(아침에) 하드 먹을라고 시방 맹그라 놓고 들어온 길이요."
"글다 감기 걸려. 글고 너무 찬 거 좋아하믄 목구녁(목구멍)에서 피 나온당께."
"알았어라우. 한나(하나)는 동생 줄라요."

밤이 깊어갔다. 조리를 만들고 있던 식구들은 나이 어린 순서대로 차례차례 꺼끌꺼끌하던 조릿대 껍질이 나뒹구는 방 한 구석에 무거운 솜이불을 덮고 스러져 갔다. 30여분 지나 밖에 한번 더 나갔다 들어와야 하는 나는 아직 졸린 눈 뚜껑에 찬물을 발라가며 조리를 더 절고 있다.

조리를 절다 말고 쉬하러 갔다온다며 밖에 나가서는 깍정이에 비스듬하게 뉘어둔 조릿대 막대를 살얼음이 언 곳에서 조심히 빼서는 꼿꼿이 세워 두고 '꽁꽁 잘 얼어라'며 기도 한번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뱁새가 집 주위를 맴돌던 다음날 아침, 굴뚝새가 쇠죽 끓이던 연기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삐 움직이던, 봄으로 향하던 대보름 며칠 남지 않던 날 일어나자마자 장독대로 달려갔다.

꽁꽁 얼어 손잡이가 된 막대를 잡아 당겨도 바로 뽑히지 않는다. 어머니 밥하시던 부엌으로 갖고 들어가 밥솥단지 주위에 갖다 놓으니 종지와 얼음덩어리가 쉽게 분리되어 손에 들 수 있게 되었다.

밥 먹기 전 한 입 빨고 또 한 입. 달콤하다 못해 쌉싸래한 그 맛. 여기에 시원함까지 곁들여져 혓바닥이 달아나고 가슴이 뻥 뚫리는 줄 알았다. 돈도 안 들고 맛까지 있었던 '김규환 표 아이스크림'은 중학교에 간 뒤로 다시는 먹을 수 없었다.

작대기로 쾅쾅 두들겨서 저걸 먹으면 끝내줬는데 요즘은 산골 깊은 데나 맘놓고 먹을 수 있답니다.
작대기로 쾅쾅 두들겨서 저걸 먹으면 끝내줬는데 요즘은 산골 깊은 데나 맘놓고 먹을 수 있답니다.김규환

덧붙이는 글 | 한겨울에 아이스크림 먹는 아이들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시 어릴 적으로 돌아가 보니 역시나 저도 그랬던가 봅니다. 아이들 먹는다는 것 말릴 이유가 사라졌네요. 내일부터 어쩌지요?

덧붙이는 글 한겨울에 아이스크림 먹는 아이들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시 어릴 적으로 돌아가 보니 역시나 저도 그랬던가 봅니다. 아이들 먹는다는 것 말릴 이유가 사라졌네요. 내일부터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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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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