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 '오수암'을 아십니까?

일제시대 판소리 OK판 <흥보전> 복각 음반 발매

등록 2004.01.29 16:51수정 2004.01.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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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OK판 <흥보전> 복각음반 표지

OK판 <흥보전> 복각음반 표지

"호박에 말뚝 박고, 초상난 데 춤추고, 불 붙난 데 부채질, 야장을 하는 데 웨장을 허고(밤에 몰래 장사 지내는 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새 초분에 불질 허고, 동네 과수(과부)는 겁탈, 혼인발 바람 넣고(혼인이 잘 되어 가는데 훼방 놓기), 시앗(첩) 싸움에 부동(부화뇌동의 준말)을 하고, 외상 술값 억지 쓰고, 술 먹은 놈 후욕(욕하기)하고, 배 앓는 놈 살구 주고, 똥 누난 놈 주저 앉히고, 우난 애기는 똥 멕이고"

놀부의 심술을 표현하는 소리가 음반에 구성지게 흐른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명창 오수암의 소리다. 이 놀부 소리를 하는 오수암은 누구인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판소리는 5명창인 김창환(金昌煥),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정정열(丁貞烈)의 시대였다. 그런데 이중 서편제의 거장 김창환의 목소리는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이 김창환 명창의 소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오수암의 목소리를 우리는 21세기가 되어서야 들어 보게 되었다.

1988년부터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유성기 음반 복각 사업을 벌여오고 있는 신나라뮤직(대표 정문교)은 1935년 '폴리돌'판 <적벽가> 및 <심청가>, 1936년 '빅터'판 <춘향가> 복각 음반을 이미 발매한 바 있으며 이번에 1941년 'OK'판 <흥보전>도 복각에 성공했다.

이로써 애초부터 녹음이 되지 않았던 <수궁가>를 제외한 일제 강점기 시대에 녹음됐던 판소리 '4바탕'을 모두 복각 음반으로 내놓은 것이다. OK판 <흥보전> 유성기(SP) 음반은 신나라뮤직이 일본에서 입수한 것으로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희귀 음반이다.

우리는 '임방울', '이화중선', '김녹주'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오수암' 명창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1908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오수암'은 판소리 5명창 김창환의 아들인 김봉학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오수암의 소리를 통해 김창환 명창의 소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음반에서 오수암은 수련에 의해 단련된 거친 목소리인 '수리성'의 매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타고난 소리꾼 임방울의 창을 능가할 정도로 목소리가 깊고 힘이 넘친다는 평을 받았다. 이 음반에서는 임방울보다 나이가 어리고 인기도 적었던 오수암이 소리를 이끄는 도창과 놀부 역을 맡고 임방울은 흥보 역을, 이화중선이 흥보 부인 역을 소화했다. 이것은 당대가 오수암 소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음반은 창극 형식으로 북 반주 대신 당시 유행했던 창극의 영향을 받아 해금과 장고, 가야금, 피리 등으로 어우러진 고악(古樂) 반주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새로운 시도라고 해석된다. 또 무엇보다 오수암, 임방울, 이화중선, 김녹주 등 당시 인기를 모았던 최고 소리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나라 뮤직 정문교 대표는 "일제강점기 중 총독부가 대동아전쟁에 미쳐 가장 혹독한 문화말살 정책을 밀어부치는 때에 한국인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인음반사에서 이런 판소리 음반을 발매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동안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던 오 명창의 육성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됐다. 특히 현재 전해지는 <흥보가>는 모두 동편제지만 이번 것은 유일한 서편제로, 김창환 선생의 서편제 <흥보가> 원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음반은 소리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사설 전편을 실어 놓아 초보자들에게도 어렵지 않은 판소리의 안내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의 험악한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 겨레 문화를 지키기 위해 발매했던 'OK'판 <흥보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판소리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여. 이제 새롭게 복각된 이 한 장의 음반으로 판소리의 진가를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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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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